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뉴델리 (문단 편집) == 주요 명소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078212929Delhi_India_Gate_Main.jpg|height=3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2022_1$largeimg_1254753807.jpg|height=300]]}}} || || '''{{{#fff 인디아 게이트}}}''' || '''{{{#fff 아마르 자완 죠티}}}''' || * '''인디아 게이트(India Gate, इंडिया गेट)''' 뉴델리 권역 동쪽 끝에 위치한 전쟁 기념관이자 [[개선문]]이다. [[제1차 세계대전]], 제3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 도중 [[플랑드르]], [[프랑스]],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동아프리카]], [[갈리폴리]] 및 근동 지방에서 전사한 84,000여 명의 인도군 희생자들을 기리는 장소. 문에는 13,300명의 군인 이름들이 일일히 새겨져 있다. 1972년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이후 검은 대리석 주각으로 깎은 구조물이 아치 바로 아래에 만들어졌다. 4개의 불꽃이 끊임없이 타오르고 있어서 '불멸의 군인의 불꽃'이라는 뜻의 '아마르 자완 죠티'라고 불리는데 [[무명용사]]의 무덤으로 사용한다고 한다. 매년 '공화국의 날'[* 1950년 1월 26일 인도 헌법이 발효된 날이다.]마다 [[인도 총리]]가 직접 이 곳에서 무명용사의 무덤을 참배하고 퍼레이드를 시작한다. 반정부 시위나 환경 시위 등 다양한 시민활동들도 여기서 벌어진다. 여러모로 뉴델리의 상징과도 같은 건축물. 문에서 150m 떨어진 곳에는 원래 [[조지 5세]]의 석상이 캐노피 안에 세워져 있었다. 1936년에 세워졌는데 하필이면 독립 열기가 한창 거셀때라 페인트로 테러를 당하거나 돌에 맞아 왕관, 코, 귀 등이 훼손되어 떨어지는 등 수난을 많이 당했다. 전쟁기념관 옆에 식민지배자의 석상을 방치하는 것이 말이되냐는 여론에 떠밀려 1968년에 결국 석상을 꺼내서 인근의 대관식 공원으로 옮겨 다른 영국 조각상들과 함께 전시하고 있다. 2022년 1월에는 [[찬드라 보스]] 동상 건립 때문에 논란의 중심이 되기도 했다. 우파 성향이 강한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찬드라 보스 탄생 125주년을 기념해 문 옆에 찬드라 보스의 동상을 건립하기로 했는데, 문제는 이 찬드라 보스가 인도 독립을 위해 [[나치 독일]], [[일본 제국]]과 손을 잡고 [[나치즘]]을 옹호했던 탓에 여러 모로 말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 물론 모디 총리는 씹고 강행했으며 2022년 9월 8일에 찬드라 보스 동상 공개식을 직접 진행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211862-bharat.webp|height=3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rashtrapati-bhavan-10.webp |height=300]]}}} || || '''{{{#fff 인도 대통령궁의 외관}}}''' || '''{{{#fff 대통령궁 내부}}}''' || * '''대통령궁(Rashtrapati Bhavan, राष्ट्रपति भवन)''' 인도 현지에서는 '라슈트라파티 바반'이라고 부르며 [[인도 대통령]]의 공식 관저다. 원래는 [[인도 제국]] 시절 총독 관저였지만 독립 이후 대통령궁으로 용도가 전환됐다. 이탈리아의 [[퀴리날레 궁]] 다음으로 세계 2번째로 거대한 국가원수의 관저이기도 한데, 거대한 리셉션 홀, 사무실, 객실, 대통령의 생활공간, 정원 등이 총 130헥타르에 달하는 넓은 면적에 만들어져 있으며 심지어 [[마구간]]도 있다. 본관에는 무려 340여 개에 달하는 방들이 있으며 인도 대통령궁이라는 위상답게 상당수가 위의 사진처럼 호화롭게 치장되어 있다고. 원래 [[캘커타]]에 거주하던 인도 총독들은 거기서도 어마어마하게 화려하게 살았다. 당시 총독이던 웰즐리 경이 대놓고 '인도는 시골집이 아니라 궁전에서 다스려야한다'라고 말했을 정도니 얼마나 호화롭게 살았는지 짐작가는 부분. 1911년 수도가 델리로 옮겨오자 캘커타 총독관저 대신 새로운 총독궁을 지어야할 필요성이 생겼는데, 이 궁전을 지으려고 4천 에이커에 달하는 땅을 사들였고 그 과정에서 부지에 살던 300가구에 달하는 마을사람들을 죄다 쫒아냈다. 뉴델리의 도시계획을 맡은 루티언스가 총독궁 설계를 담당했고 무려 20년 동안 영국과 인도를 오가며 총독궁을 지었다. 정원은 [[무굴 제국]] 황실 형식을 따랐고 예산 때문에 총 부피를 13,000,000 입방피트에서 8,500,000 입방피트로 줄였지만 여전히 압도적인 크기의 대건물이었다. 4층에 달하는 대건물인데다가 10억 개의 벽돌이 이 건물을 짓는데에 들어갔다. 기본적으로는 무겁고 권위주의적인 바로크풍의 건물이지만 중앙 돔은 [[힌두교]]의 사리탑에서 모티브를 따오는 등 인도의 건축양식을 반영하기도 했다. 1931년에 완공되었고 그 이래 16년 동안 총독의 공식 관저로 쓰였다. 인도가 독립한 이후에도 여전히 이 곳은 인도 대통령 관저로 사용했다. 다만 지나치게 화려하고 권위주의적이라 부담을 느낀 초대 인도인 총독 [[차크라바르티 라자고팔라차리]]가 침실을 본관에서 앞의 더 작은 손님용 별채로 옮겼고, 원래 살던 본관은 국가 원수 방문을 위한 접견실로 사용했다. 후임 대통령들도 모두 선례를 따랐고 현재는 해외 국가 원수가 인도를 방문했을 때 요긴하게 써먹고 있다. 원래는 함부로 출입이 불가능했으나 2014년 7월부터는 내부에 박물관을 개관하여 역대 대통령들의 생애를 전시해놓고 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kyline_at_Rajiv_Chowk.jpg|width=100%]]}}} || || '''{{{#fff 코넛 플레이스}}}''' || * '''코넛 플레이스(Connaught Place / Rajiv Chowk, कनॉट प्लेस / राजीव चौक)''' 공식적인 이름은 '라지브 초크'라고 한다.[* 인도 전 총리였던 [[라지브 간디]] 총리에게서 이름을 따왔다.] 뉴델리의 금융, 상업, 비즈니스 중심지로 수많은 인도 기업들의 본사가 여기 들어서있고 명실상부 뉴델리 최고의 쇼핑 관광 메카로 불린다. 워낙 많은 인도 기업들이 여기 들어오려하다보니 2018년 기준으로 평방미터당 임대료가 무려 1,650달러로 세계에서 9번째로 비싼 사무실 자리라는 명성을 떨치기도 했다. 원래 뉴델리가 지어지기 이전에는 그냥 나무가 가득한 언덕이었으나 영국이 본격적으로 개발하면서 크게 번화했다. 영국은 여기에 2층짜리 거대한 원형 아케이드를 만들어 1층에는 상업시설을, 2층에는 거주시설을 지으려 했다. 원래는 이거보다도 더 크게 지을 계획이어서, 동심원 형태로 원형 건물 블럭을 만들고 그 사이를 아치로 연결해 중앙으로부터 길들이 뻗어나가게 만든 다음 아래에는 중심에 철도역을 만들고 철도와 연결시킬 계획이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현실성이 없다는 이유로 폐지됐고 현재의 모습으로 축소해서 만들어졌다. 1933년에 코넛 플레이스가 완공되자 수많은 업주들이 물밀듯이 들어섰다. 주로 유럽식 고급 제품을 파는 상점들이 주로 입점했고, 델리에 살던 지역 귀족층들이나 현지 엘리트 계급들이 이 곳에 쇼핑하러 들르면서 코넛 플레이스는 호황을 누렸다. 영화관이 들어서 발레 공연, 연극, 콘서트를 열었고 유럽, 무굴식 요리를 제공하는 고급 식당이 문을 열었다. 한때 이 곳에 뉴델리 전체에서 가장 거대한 식당이 있었을 정도였다. 코넛 플레이스는 영국 식민기 내내 [[스위스]] [[초콜릿]], 레스토랑, 호텔 따위가 즐비한 고급 유흥지로 활기를 누렸다. 독립한 후에도 코넛 플레이스는 뉴델리의 최중심지로 명성을 유지했다. 70년대 후반에는 코넛 플레이스 지하에 시장이 건설됐다. 특히 1986년에 들어선 인도생명보험공사 본부가 논란이 되기도 했는데 유럽식 아케이드풍인 코넛 플레이스에서 웬 유리로 만든 현대식 건물이 너무나도 눈에 띄었기 때문. 그러나 이후 코넛 플레이스 인근에 현대식 건물들이 수도 없이 지어지면서 이 논란은 조용히 사라졌다. 2000년대 들어서는 예전의 영광을 많이 잃은 상태다. 한때는 고급 상점 밀집지였고 지금도 식민통치기부터 영업해온 유서깊은 가게들이 많이 남아있지만 지나친 난개발과 환경오염, 교통혼잡과 관광객들 때문에 빛이 바래버린 것이다. 게다가 2008년 9월 13일 이슬람 강경조직인 무자헤딘 반군에 의해 코넛 플레이스에서 발생한 7건의 폭탄테러로 인해 20명이 사망하고 90여명이 부상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때 쓰레기통에서 폭탄이 터졌다는 이유로 쓰레기통을 죄다 없애버렸는데 이때문에 악취가 더 심해졌다. 결국 2010년대에 대대적으로 코넛 플레이스에 대한 재개발과 환경미화활동을 개시했지만 인도 특유의 부정부패와 마감 지연 때문에 별 효과는 보지 못하고 있는 중.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델리 연꽃 사원.jpg|height=3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c3379fd2f58d0458dcd46333c552a579.jpg|height=300]]}}} || || '''{{{#fff 연꽃 사원의 모습}}}''' || '''{{{#fff 연꽃 사원의 내부 모습}}}''' || * '''연꽃 사원(Lotus Temple, कमल मंदिर)''' 뉴델리 내에서도 독특한 디자인으로 눈길을 끄는 건물. [[바하이교]]의 사원이다. 1986년 12월 완공된 이래로 그 아름다운 모습으로 뉴델리의 랜드마크가 되었으며 모든 바하이교 예배당이 그렇듯이 종교나 인종, 성별, 기타 등등에 상관없이 아무나 들어가볼 수 있다. 바닥은 총 9개의 면으로 이루어졌고 외형은 27개의 하얀 대리석 꽃잎들이 3겹으로 감싸진 모습이다. 높이는 약 34m가 약간 넘으며 문은 한 면에 1개씩 총 9개, 1,300명을 수용가능하다. 바하이 신앙에서는 바하이교의 예배당이 모든 종교의 사람들이 서로 모여 묵상하고 기도하는 공간이 되어야한다고 믿는다. 따라서 그 어느 종교를 믿든지간에 자유롭게 입장할 수 있고, '''심지어 내부에서 [[성경]]이나 [[코란]]을 읽어도 괜찮다.''' 다만 대놓고 [[무신론]]스럽거나 [[신성모독]]적인 글을 읽는 것은 금지되어있으며 다른 종교인들이 들어와서 [[설교]], [[포교]], 강의 같은 행동들도 당연히 금지된다. 바하이교의 예배에는 정해진 형식이 없으며 딱히 의례절차도 없다. 바하이교에서 [[연꽃]]은 순결, 신성함, 영성 등을 상징한다. 특히 하얀 대리석을 사용해서 더욱 그러한 이미지를 부각했는데, 이 대리석은 [[그리스]] [[아테네]] 근처의 펜텔리산에서 직접 공수해온 대리석이다. 즉 '''[[파르테논 신전]]과 똑같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는 이야기. 다만 최근에는 환경오염 때문에 갈수록 색이 싯누레하게 변색되고 있다고 한다. 주변에는 9개의 연못이 파여있고 사원의 총 전기 사용량 500kW 가운데 120kW는 사원 자체의 태양광 패널에서 생산된 전기로 공급된다. 매월 이 방법으로 12만 루피를 절약한다고. 델리 전체에서 태양에너지를 사용한 첫 사원이라고 한다. 휴일에는 10만 명이 넘는 사람이 방문할 정도로 대단히 인기많은 장소다. 연간 100만 명에서 250만 명이 방문하며 뉴델리의 핵심 랜드마크들 중 하나로 꼽힌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humayun-tomb-new-delhi.jpg|height=3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6227817_orig.jpg|height=300]]}}} || || '''{{{#fff 후마윤 영묘의 모습}}}''' || '''{{{#fff 영묘의 내부 모습}}}''' || * '''후마윤 영묘(Humayun's Tomb, हुमयून का मक़बरा)''' [[무굴 제국]]의 제2대 황제 [[후마윤]]의 묘지. 무굴 황제들의 무덤들 중 가장 보존이 잘된 것들 중 하나로 꼽힌다. 인도 아대륙 최초로 페르시아식 정원을 무덤과 함께 조성한 정원식 무덤이기도 하다. 후마윤 뿐만 아니라 수많은 후임 황제와 황자들도 함께 합장되어 있어서, [[샤 자한]]의 아들 다라 시코 황자, [[자한다르 샤]], [[파루크시야르]], [[라피 웃 다라자트]], [[알람기르 2세]] 등이 함께 여기 묻혀있다. 1993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도 등재됐다. 무굴 황제 후마윤이 1556년 사망하자 그의 아내 베가 베굼 황후는 큰 슬픔에 잠겨 남은 여생을 남편을 위한 묘지 짓기에 쏟아붇기로 결심한다. 1565년에 착공해 1572년에 완공되었으며, 무려 150만 루피가 소요되었는데 이 비용 모두를 황후 개인 금고에서 지불했다. 막대한 비용답게 매우 호화로운 영묘였는데, 1611년 여길 방문한 영국 장교의 기록에 의하면 전체에 화려한 카펫이 깔려있고 영묘 위에 후마윤의 단검, 망토, 검, 터번, 신발 따위가 안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무굴 제국이 쇠퇴하면서 여기도 함께 쇠락했고, 특히 [[세포이 항쟁]] 당시 최후의 황제 [[바하두르 샤 2세]]가 여기 숨어있다가 잡히기도 했다. 영국인들은 기존의 무굴식 정원을 파괴했다. 수로를 싹 메워버렸으며 대신 화초와 나무를 심어 영국식 정원으로 개조했다. 다만 1905년에 커존 총독이 다시 복구하긴 했다. 인도 독립 이후에도 수난은 계속되어서 1947년에는 [[파키스탄]]으로 갈 무슬림들이 대기하는 수용소로 쓰였는데, 무려 5년 동안 난민들이 떼거지로 영묘 위에 머무르며 거의 도떼기 시장판처럼 되어 막대한 손상을 입었다. 다만 90년대 들어 영묘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지며 대부분의 시설들이 복구되었고, 특히 정원 분수대의 경우 몇 백여년만에 재건되기까지 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인도 국회의사당.jpg|height=3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c1_4772774.jpg|height=300]]}}} || || '''{{{#fff 인도 국회의사당}}}''' || '''{{{#fff 의사당 개관을 축하하는 모디 총리}}}''' || * '''국회의사당(Parliament House, संसद भवन)''' [[인도]]의 [[국회의사당]]. 의회내각제인 인도 정치의 최고 중심지이다. 앞에 있는 삼각형 모양의 건물이 국회의사당이다. 뒤에 있는 원형의 건물은 옛 국회의사당이다. 1927년 지어져 제국입법위원회 건물로 쓰이다가, 인도가 독립한 이후에는 인도 제헌의회 건물로, 나중에는 국회의사당으로 사용했다. 144개의 기둥들이 원형으로 건물을 빙 두르고 있으며 내부에는 중앙 홀이 있다. 그러나 현재는 새로운 국회의사당에 밀려나 민주주의 박물관으로 개조되어 사용되고 있다. 원래 쓰던 국회의사당 건물은 1927년 지어진 것으로 뉴델리가 만들어질 때 같이 지어진, 100년 가까이 된 노후한 건물이었다. 게다가 워낙 오래된 건물이라 지진에도 취약했고 금이 갈라지는 등 훼손도 심한 편이었다. 그래서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새 국회의사당을 그 바로 곁에 지었는데, 2020년에 착공하여 2023년 5월 28일에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직접 완공식을 축하했다. 타밀 전통을 따라 모디 총리가 직접 램프에 불을 붙이며 개관식을 주관했는데, 원래는 이게 [[드라우파디 무르무]] 대통령이 해야될 일이라 이에 불만을 품은 [[인도 국민회의]] 등 야당은 개관식에 불참했다. 뿐만 아니라 의사당에 걸린 지도에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네팔]] 등 분할되기 이전의 인도 전체를 묘사하고 있어서 외교적으로 반발을 사기도 했다. 현재 국회의사당은 150년 이상을 끄덕없이 버틸 수 있게 설계됐다. 하원 회의장에는 888석, 상원에는 384석을 배치했는데 미래의 인구 증가를 대비해 일부러 실제보다 더 많은 의석을 만들어두었다고. 중앙 로비의 천장에는 거대한 푸코 진자가 하나 매달려 있는데, 콜카타의 국립과학박물관이 제작했고 인도에서 가장 큰 [[진자]]로 높이 22m, 무게 36kg에 달한다. 인도의 통합과 우주의 광활함을 상징한다고 한다. 그 외에도 '지식의 문', '힘의 문', '[[카르마]]의 문' 등 3개의 문을 설치하고 문마다 양 옆에 힌두 신들의 조각상을 설치하는 등 인도 곳곳의 건축 양식을 녹여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