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니더작센 (문단 편집) == 역사 == [include(틀:신성 로마 제국)] 작센(Sachsen)이라는 명칭은 [[앵글로색슨족|작센족]]에서 비롯되었다. 이곳은 홀슈타인과 더불어 원래 작센족이 살던 지역으로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대제]]가 정복하기 전까지 작센 왕국이 있던 곳이다. 810년대 최종적으로 작센 왕국이 [[프랑크 왕국]]의 영토가 되면서 작센 공국으로 격하되었고 이 지역은 크게 서쪽의 [[베스트팔렌]]([[뮌스터]], [[파더보른]], [[올덴부르크]]), 동쪽의 [[오스트팔렌]]([[브라운슈바이크]], [[뤼네부르크]] 등),[* 팔렌(Falen)은 평지를 뜻하는 말이다. 서쪽 평지, 동쪽 평지.] 중부의 엥게른([[민덴]], [[함부르크]], [[하노버]]),[* Engern. [[영국]]의 지역명인 [[잉글랜드]]와 동일 기원을 가진다. [[영국인]]을 주로 이루는 앵글로색슨족을 말할 때의 앵글로는 앵글인을 말하며 이들은 [[유틀란트 반도]] 중부에서 기원했다. 그리고 이들이 이 엥게른의 명칭의 기원이 되었다. 색슨은 작센족의 [[영어]]명이다.] 북부의 노르트알빙엔(현 홀슈타인)으로 구분되었다. 작센 공국은 이후 빌룽 가문에게 넘어가며, [[동프랑크 왕국]]을 거쳐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국이 되었다.[* [[독일 왕국]]의 건국 때부터 있던 5대 [[부족 공국]] 중 하나다. 나머지 4개는 [[프랑켄]], [[슈바벤]], [[바이에른]], [[로렌|로트링겐]]. [[튀링겐]]도 건국 당시 독립적인 제후령 영토였지만 공작 지위는 아니었다.] 작센의 상징은 빨간 배경에 하얀 말. 현대 니더작센의 문장으로 쓰이며,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의 문장에도 베스트팔렌을 상징하는 표식으로 남아 있다. 이는 작센족의 부족장이었던 비두킨트(Widukind)가 전설 속에서 탔다는 [[오딘]]의 말 [[슬레이프니르]]에서 기인한 것으로, 후일 작센 공작이 되는 [[벨프 가문]]이 이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면서 완전히 자리잡았다. 나중에 하노버가 말([[말(동물)|동물]]과 표준 [[독일어]] 둘 다)로 유명해지면서... 선견지명이 되었다. 중세부터 작센 공국은 동부의 [[슬라브]]족을 토벌하며 영토를 넓혀갔다. 이에 따라 작센을 부르는 지역이 나날이 커져 갔고 특히 초기 동프랑크 왕국이 지금의 [[작센안할트]] 지역에 [[크베들린부르크]], [[마그데부르크]] 등을 건설하고 투자하면서, 작센의 중심지도 점차적으로 [[엘베강]]역으로 동진했다. 이는 10세기 [[벨프 가문]]의 작센 공작이었던 [[하인리히 사자공]] 때 절정에 달해 [[동방식민운동|동부로 무한 영토 확장]]에 나섰고, 잘 나간다며 위아래 없이 막장을 부리던 하인리히 사자공은 [[상관]]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신성 로마 제국)|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의 심기를 건드려 [[토사구팽]] 당했다. 일단 작센 공국의 영토가 너무 컸기 때문에 분할하기로 결정, 1235년 제국 의회에서 전통적인 작센 지역인 베스트팔렌과 오스트팔렌, 엥게른은 크게 [[쾰른 선제후국|쾰른 대주교]]에게 넘어간 베스트팔렌 공국과 [[벨프 가문]]의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국으로 분리되었고, 작센 공작 칭호는 [[안할트]] 일대를 통치하던 [[아스카니아 가문]]에게 넘어갔다. 이후 아스카니아 가문은 상속 문제로 작센-[[비텐베르크]]와 작센-라우엔부르크로 나뉘었고 [[금인칙서#s-2.8|1356년 금인칙서]]에 따라 비텐베르크계가 작센 선제후가 되었다. 하인리히 사자공이 추방된 후 작센 공국이 3개로 분할될 때 실제로는 가문 간 알력, 분할상속, 강력한 권력의 부재로 더 많은 소국들이 파생되었다. 우선 주교령들은 모두 독립적이었기 때문에 각각 주교, 대주교령이었던 [[파더보른]], [[뮌스터]], [[힐데스하임(독일)|힐데스하임]], [[브레멘]], [[함부르크]]는 별개였으며, 각각 1091년과 1111년 작센 공국의 제후국으로 설립된 올덴부르크 백국, 흘슈타인 백국과 [[샤움부르크리페 공령|샤움부르크리페]] 또한 분리되었다. 올덴부르크는 아예 처음부터 작센 공국과 분리되었고, 홀슈타인 백국은 작센-라우엔부르크의 제후국이 되었다가 공국으로 신분상승(?)하며 샤움부르크-리페는 후일 현대의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로 통합되었다. 브레멘과 함부르크는 훗날 제국[[자유도시]]로 승격되고 [[한자 동맹]]으로 독립적인 행보를 나아간다. 1448년 올덴부르크 백작 크리스티안 7세가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1세]]로 선출되어 [[덴마크]]를 물려받아 [[올덴부르크 왕조]]를 개창하였고, 올덴부르크 백국은 동생 게르하르트에게 물려주었다. 크리스티안 1세는 1460년 홀슈타인 백국도 상속받으면서 [[슐레스비히홀슈타인]]과 덴마크의 오랜 유대관계가 시작되었다. 니더작센이란 명칭은 16세기에 [[신성 로마 제국]]의 단위 지역(Reichskreise) 명칭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당시엔 브레멘과 함부르크,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국, 메클렌부르크 공국, 홀슈타인 공국, 작센-라우엔부르크 공국이 이 지역에 포함되었다. [[작센 선제후국]]과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안할트]], [[포메른]] 등이 오버작센으로 분류되었다. 현재의 니더작센 주와 비교해보면, 지금은 홀슈타인으로 분류되는 작센-라우엔부르크나 따로 분리되는 메클렌부르크가 포함되어 있고, 올덴부르크와 오스나브뤼크는 빠져 있다. '''즉 중세 시기의 니더작센 개념과 오늘날의 니더작센 주의 개념은 차이가 존재했다는 것.'''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국은 1269년 브라운슈바이크 영주령과 뤼네부르크 영주령을 신설하여 자녀들에게 분할상속하였다. 이 때 공작 작위는 브라운슈바이크 영주령으로 내려갔다. 1291년에 브라운슈바이크 영주령은 또 다시 3개로 분할되며 브라운슈타인-볼펜뷔텔 영주령, 괴팅겐 영주령, 그루벤하겐 영주령이 되었고, 1432년 칼렌베르크 영주령이 브라운슈타인-볼펜뷔텔에서 떨어져 나왔다. 1495년엔 ~~드디어~~ 분열을 멈추고 다시 합쳐지기 시작했는데 먼저 칼렌베르크와 괴팅겐이 합체한 후, 1617년엔 그루벤하겐과 뤼네베르크가 합쳐졌다. ~~합체로봇?~~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의 결과 북반부는 [[스웨덴 제국|스웨덴]]이 차지하였다. 1692년 칼렌베르크의 영주이자 뤼네베르크-브라운슈바이크의 공작이었던 에른스트 아우구스트가 선제후가 되면서 칼렌베르크를 중심으로 브라운슈바이크 영주령만 제외한 나머지가 모두 통합됐다. 이 때 하노버 공중 고문이었던 [[고트프리트 폰 라이프니츠]]가 벨프 가문의 족보를 조사하여 선제후 상속 권한이 있다는 증거물을 마련했다는 건 유명한 일례. [[팔츠 선제후국]]이 가톨릭 선제후가 되면서[* 팔츠 선제후는 [[개혁교회|칼뱅파]]였던 지메른계의 대가 끊기면서 가톨릭 신자였던 노이부르크계의 [[필리프 2세 빌헬름|필리프 빌헬름]]이 물려받았다.] 신교도 선제후로는 브란덴부르크[*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을 도운 대가로 1701년 [[프로이센 왕국]]이 된다.] 딱 하나밖에 남지 않아 제국 내에서 세력이 위축될 것을 우려한 신교도 제후들과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는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를 9번째 선제후로 임명했다. 칼렌베르크의 중심은 하노버였기 때문에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는 자신의 작위를 하노버 선제후로 개칭하였다. 이 때 벨프 가문으로선 또 다른 복권에 당첨되었으니..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의 부인, [[팔츠의 조피]]는 [[잉글랜드 왕국]] 국왕 [[제임스 1세]]의 외손녀였는데, [[앤 여왕]]을 마지막으로 제임스 1세의 직계 [[스튜어트 왕조]]가 끊기게 된 것. 앤 여왕에게는 이복동생이 있었으나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영국 왕위를 이어받을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영국 왕위 승계권이 조피를 통해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의 아들 게오르크 루트비히에게 가게 되었다! 게오르크 루트비히는 아버지에 이어 1698년에 하노버 선제후가 되었고, 1714년 앤 여왕이 죽어 영국 왕위도 얻음으로서 '''[[조지 1세]]'''가 되었다. 하노버 선제후는 조지 1세 때부터 [[하노버 왕조|하노버 가문]]의 영국 왕실이 가지게 되었고, 조지 1세의 고손자 [[조지 4세]]가 [[조지 3세]]의 섭정 시절 [[빈 회의]]에 참석해 하노버 선제후의 공작위를 왕국으로 급을 높이는데 유럽 열강들의 합의를 이끌어 내어, 1814년에 [[하노버 왕국]]이 수립되어 [[동군연합]]이 되었다. 이 때 베스트팔렌의 오스나브뤼크도 하노버 왕국으로 편입됐다. 동시에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국의 일부였던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이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으로 독립되었다. 이후 하노버 왕국도 영국 왕실의 의도에 따라 자유주의적이고 계몽주의적인 사상이 유입되어 공민권이 수립되고 개방적인 사회 분위기가 성립된다. 조지 4세는 1734년 지금도 독일에서 탑을 달리는 [[괴팅겐 대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이렇게 하노버도 [[스코틀랜드 왕국]]처럼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영국]]이 꿀꺽 삼키나 했는데... 조지 4세가 자녀 없이 죽으면서 동생인 [[윌리엄 4세]]가 영국과 하노버의 왕위를 이어 받았으나 윌리엄 4세에게는 적통인 자녀가 없었다. 따라서 조카인 [[빅토리아 여왕|빅토리아]]에게 승계해야 했는데 여성에게도 왕위가 상속되는 영국법과 달리 하노버는 남자에게만 왕위가 상속될 수 있는 [[살리카법]]을 따랐으므로 빅토리아는 하노버 왕위를 계승할 수 없었다. 그래서 윌리엄 4세가 죽고 영국 왕위는 빅토리아에게, 하노버 왕위는 윌리엄 4세의 동생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에른스트 아우구스트]]가 물려받게 되며 동군연합은 해체되었다.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는 어릴 적부터 독일에서 생활했으며 군인으로 자라났다. 아무래도 근대적 군인식 사고방식이 머리에 박히면서 기존 자유주의적이었던 하노버 왕국을 억압적이고 절대 왕정식으로 개조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괴팅겐 대학교의 ([[그림 형제]]를 비롯한) 일곱 교수가 항의서를 보냈으나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는 그들을 해임시켜 버렸다. 1851년 [[게오르크 5세]]가 그의 아버지를 이어 새 하노버의 왕이 되었다. 게오르크 5세는 젊을 적 한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가 중년이 돼서 다른 쪽 눈의 시력도 놀이를 하다 잃게 되면서 장님이었다. 이 당시엔 독일 지역의 패권을 두고 [[프로이센 왕국]]과 [[오스트리아 제국]]이 신경전을 벌이던 시기였고 결국 둘 사이에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전쟁]]이 터졌는데, 게오르크 5세는 오스트리아의 편을 들었다. 결과는 오스트리아의 패. 결국 1866년 [[프로이센군]]이 하노버를 침공했으며, 하노버 왕가는 영국으로 피신하고 하노버 왕국은 프로이센에 강제 합병당했다. 하노버 왕가는 하노버 왕국을 모두 잃고 에른스트 아우구스트가 영국 왕실의 일원으로서 받았던 컴벌랜드 공작으로 살아간다. 게오르크 5세의 손자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3세는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빌헬름이 1884년 자녀 없이 죽음에 따라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되어 다시 독일로 귀환한다.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3세는 [[독일 제국]] [[카이저|황제]] [[빌헬름 2세]]의 딸 빅토리아와 사랑에 빠져 결혼까지 함으로서 성공적으로 독일 왕정에 복귀하게 된다. 하지만 곧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고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3세는 독일의 편에 들게 됨으로서 영국 의회는 1917년 귀족법을 개정하여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3세의 컴벌랜드 공작위를 회수해 버린다. 그리고 독일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해 [[바이마르 공화국|공화국]]이 되었고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3세는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위도 잃었다. 올덴부르크 백국은 앞서 말한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1세]]의 동생 게르하르트의 가계가 물려받았다가 1667년 게르하르트의 가계가 단절되며 [[프레데리크 3세]]가 올덴부르크 백국을 물려받았다. 홀슈타인은 [[크리스티안 3세]]의 분할로 인해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국이 덴마크 왕실 영지와 덴마크 올덴부르크 왕조의 분가인 [[홀슈타인고토르프 왕조|홀슈타인-고토르프 가문]]으로 이등분된 상황에서 1761년 [[러시아 제국]]의 제위를 이어 받은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 [[표트르 3세|카를 페터 울리히]]가 1762년 부인 [[예카테리나 2세|예카테리나]]에 의해 폐위당하고 죽임을 당한다. 홀슈타인-고토르프 공국이 러시아 제국으로 들어가는 상황을 막기 위해 덴마크는 올덴부르크 백국과 홀슈타인-고토르프 공국을 교환했다. 15세기 신성 로마 제국과 체결했던 리베 조약에 의해 홀슈타인 공작과 슐레스비히 공작은 동일 인물이 동시에 가져야 했기 때문. 이에 홀슈타인 공국으로 다시 하나로 합쳐져 덴마크의 영토가 되었고, 올덴부르크 백국은 홀슈타인-고토르프 가문의 분가[* [[스웨덴 국왕]] [[아돌프 프레드리크]]의 동생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가 물려받았다. 여담으로 아돌프 프레드리크 국왕은 러시아 제국 [[표트르 3세]]의 6촌 아저씨로, 표트르 3세와 결혼한 [[예카테리나 2세]]의 외숙부이기도 했다.]에게 상속되었다. 1777년에는 공국으로 승급했다. 1815년에는 [[올덴부르크 대공국|대공국]]이 되고 1871년에 독일 제국에 합류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들어선 [[바이마르 공화국]]은 구 하노버 왕국과 브라운슈바이크 공국, 올덴부르크 대공국 및 자잘한 주교령 영토를 모두 [[프로이센]] 지방으로 분류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고 [[나치 독일]]이 패망함으로써 미국과 영국, 프랑스의 분할 통치에 들어가는데, 아무래도 영국과 깊은 관계가 있던 지역이었기 때문인지 이곳은 영국이 통치했다. 1946년 8월 영국 정부는 구 하노버 왕국 지역을 프로이센 지방에서 분리해 하노버를 주도로 하는 하노버 주를 신설하였다. 하노버 주의 초대 주총리였던 하인리히 빌헬름 코프는 브라운슈바이크 공국, 올덴부르크 공국 지역과 주변 다른 지역들도 합병해 니더작센 주가 되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코프의 주장은 사실 이미 1920년대부터 나오던 행정구역 개혁안을 토대로 한 것이었고 실제 생활권이나 경제권에 부합했다. 브레멘도 니더작센에 합병하려는 방안이 검토되었으나, 당시 브레멘 시장이 미국을 찾아가 브레멘의 역사적 상황을 설명하고 전통적으로 하노버와는 독립적인 지역이었음을 강변해 브레멘은 별도의 주가 되었다.[* 당시 미군의 군정 통치지역은 독일 남부지역이었으나 미군의 병참선(해운) 유지의 필요성으로 브레멘시는 미국에 넘겨졌다. 이는 미국이 영국 식민지이던 시절부터 브레멘이 미국과 독일을 이어주는 항로를 개척하고 유지한 역할을 하였던 이력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브레멘하펜엔 브레멘을 통해 미국으로 이민간 사람들의 역사와 자료를 보관 전시하는 이민 박물관이 있다.] 결국 영국 군정은 1946년 11월 브라운슈바이크와 올덴부르크 지역을 하노버 주와 합병한 뒤 니더작센 주를 출범시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