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다마스쿠스 (문단 편집) ===== 툴룬 왕조 ===== [[파일:툴룬 왕조 동전.jpg|width=560]] 디마슈크에서 주조된 하룬 이븐 쿠마라위야의 디나르 금화. 한편 이사의 반란은 아흐마드에게 중앙 정부에게 완충 지대를 제공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토벌을 명분 삼아 합법적으로 군대를 양성할 수 있었다. 또한 아마주르 역시 상당히 자치적으로 시리아를 다스렸고, 877년 압바스 정부의 아흐마드 토벌 시도 때도 크게 호응하지 않았다. 결국 적은 보급에 분노한 토벌군이 항명하며 원정은 무산되었다. 비적 토벌, 도로 확보, 조세 재정립 등 시리아를 강력히 다스리던 아마주르는 878년 사망하였고, 어린 아들 알리가 총독이 되었다. 유능한 아마주르의 생전에 침묵하던 아흐마드는 칼리파 알 무타미드와 실권자 알 무와파크 간의 갈등 속에서 전자를 지지, 칼리파의 윤허 하에 출병하여 시리아를 별 저항 없이 접수하였다. (878년) 디마슈크에서 아흐마드는 옛 정적이자 현지 아밀 (행정관)이던 이븐 알 무다비르의 재산을 압수한 후 감금하였다. 또한 그는 선대 통치자들을 기리는 의미로 무아위야 영묘 터를 방문한 후 그곳에 성소를 세웠다. 이후 아흐마드는 알레포와 안티오크의 저항을 일소한 후 킬리키아 (앗 투구르 알 아와씸)와 자지라를 복속시켜 [[툴룬 왕조]]의 강역을 최대로 넓혔다. 다만 이는 오래가지 않았다. 882년 가을 알레포 태수 룰루가 압바스 조로 이탈하였고, 타르수스의 야자만 역시 같은해 자립하였다. 이에 아흐마드는 출정하였는데, 디마슈크에 이르러 급보가 날아왔다. 실권자인 형 무와파크에 눌려 지내던 칼리파 알 무타미드가 이집트로 탈출하려 한 것이다. 칼리파의 보호자로서 정당성을 얻을 기대에 아흐마드는 진군을 멈추고 디마슈크에서 그를 기다렸다. 그러나 이라크 서부의 알 하디싸에서 알 무타미드는 일행 중 튀르크 장군 이샤크의 반란으로 사마라로 송환되었다. 알 무와파크는 칼리파를 자신의 거점 [[와시트]]에 감금하곤 이샤크를 시리아와 이집트의 총독으로 선포하였다. 그러자 아흐마드는 디마슈크에 울라마들을 모아 무와파크를 찬탈자로 규탄하고 그에 대한 지하드를 선언하였다.[* 오직 이집트 수석 판관 바카르 이븐 쿠타이바 등 세 명만이 반대하였다.] 다만 양측은 각자의 역내 사원들에서 서로를 저주하는 것 외에 실제로 무력 충독을 빚지는 않았고 알레포는 수복되었다. 그러던 884년 5월, 아흐마드가 실패한 타르수스 원정 후 사망하고 20살의 차남 쿠마라위야가 계승하며 상황은 급변하였다. 알 무와파크는 협상 노선을 파기하고 그해 여름 추가 파병 약속과 함께 이샤크와 무함마드 이븐 아불 사즈 휘하의 원정군을 파견하였다. 이내 툴룬 왕조의 디마슈크 총독이 항복 의사를 밝혔고 안티오크와 알레포, 홈스가 점령되었다. 이에 쿠마라위야 역시 병력을 파견하였고, 그들은 전향한 총독을 축출하고 디마슈크를 접수하였다. 이후 샤이자르로 향해 진영을 차린 툴룬 군대는 무와파크의 아들 아불 압바스에게 증원된 압바스 군의 기습에 대패하였다. 패잔병들은 디마슈크로 철수하였는데, 압바스 군이 그곳으로 향해오자 더 남쪽의 라믈라로 도주하였다. 따라서 885년 2월, 아불 압바스는 디마슈크를 무혈 점령하였다. 병사들의 탄원에 쿠마라위야는 친정에 나서 라믈라에서 패잔병과 합류하였다. 아불 압바스 역시 디마슈크에서 남하했는데 일선 사령관인 이샤크 및 무함마드가 신중론을 주장하자 그들을 겁쟁이라 매도하였고, 분노한 장군들을 젊은 왕자를 두고 철수하였다. 두 젊은 왕공들은 885년 4월 초엽, 라믈라 북쪽의 평원 앗 타와힌(방앗간들)에서 맞섰다. 10배의 병력 차이에도 초반의 전투는 압바스 군의 압승이었고, 쿠마라위야는 당나귀를 타고 도주하였다. 그 후 아불 압바스와 휘하 병력은 승리를 만끽하며 적진 약탈에 전념하였다. 그때 툴룬 군대의 장교 사드 알 아이사르가 반격에 나서 적 장교들을 전사시키자 전황은 역전되었다. 놀란 아불 압바스 역시 도주하였고, 역으로 그의 진영이 약탈되었다. 패잔병들은 디마슈크로 향했지만 주민들이 입성을 거부하였고, 타르수스를 거쳐 철수하였다. 한편 승리를 이끈 사드는 디마슈크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쿠마라위야의 토벌군에 패하고 살해되었다. 쿠라마위야는 886년 압바스 조에 조공하는 대가로 휴전하였고, 이후 자지라와 타르수스를 복속시켜 부왕의 강역을 회복하였다. 다음 칼리파 [[알 무타디드]]와도 우호를 유지하던 쿠마라위야가 896년 1월 암살당하며 툴룬 왕조의 미래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14세의 장남 자이쉬가 계승했으나 곧 살해되었고 동생 하룬이 옹립되었으나 정사는 재상들의 수중에 있었다. 이틈을 노린 알 무타디드는 897년 타르수스를 수복하였고 하룬을 압박하여 홈스 북쪽의 시리아 할양 및 연공 증대[* 886년 불특정, 893년 30만 디나르, 896년 45만 디나르로 인상됨]를 얻어내었다. 동시에 쉬아 베두인 세력인 [[카르마트]]가 팔미라에 거점을 두고 시리아를 습격하기 시작하였다. 902년 12월, 라카에서 시리아 총독 투구즈를 격파한 카르마트 장군 자카르와이의 두 아들 야흐야와 후세인이 디마슈크를 포위하였다. 툴룬 왕조의 원군은 패퇴하였지만 투구즈의 항전으로 야흐야가 전사하는 타격을 입은 카르마트는 조공을 대가로 주변 도시들을 약탈한 후 회군하였다. (903년 7월)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