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다카히토 (문단 편집) == 출생과 종전 전까지의 삶 == [[파일:external/pds.exblog.jp/a0287992_037963.jpg|width=500]] 큰형 쇼와 덴노와는 14살, 바로 위의 셋째 형 노부히토(宣仁) 친왕하고도 10살 차이가 나는 [[늦둥이]] [[막내]]로 태어났다. 다카히토 친왕이 태어날 때는 [[메이지 덴노]]의 [[후궁]]이자 다이쇼 덴노의 서모인 [[소노 사치코]]가 [[출산]]을 도왔다고 한다. 형들과 달리 [[다이쇼 덴노]]와 [[데이메이 황후|사다코 황후]] 부부가 궁정에서 직접 길렀다. 당시 관습상으로는 양육계를 따로 두었고, 황실의 자녀들은 어려서부터 부모와 떨어져 시종들의 손에 자랐다. 그러다 1960년 첫 아이 나루히토 친왕을 낳은 아키히토 황태자& 미치코 황태자비 부부는 아이를 자신들의 곁에 두고 키웠고, 이때부터 [[일본 황실]]에서도 아이들을 부모의 곁에서 키우게 되었다. 형들과는 나이 차가 있는데다, 3명이나 되는 형들이 있어 황위계승 가능성도 낮았기에 비교적 행동반경이 자유로웠다고 한다. 이는 훗날 성인이 된 그가 '''[[빨갱이]] [[왕자]]님''' 소리 듣는 배경 중 하나가 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동양사학을 전공하던 다카히토가 전후 '''"(초대) [[진무 덴노]]는 실제 역사가 아니라 [[신화]]다"'''라고 했다는 말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물론 현대 역사학계에서 진무 덴노는 [[스진 덴노]]에서 [[모티브]]를 딴 신화적 존재라는 게 정설이지만, 덴노가를 신성시하는 극우주의자들에겐 그런 팩트를 말해줘봤자 [[신성모독]]이나 당하는 기분일테니. 그러나 다카히토는 [[비국민|"나는 거짓을 말하는 자가 애국자로 칭송받고 사실을 말하는 자는 매국노로 매도당하는 세상을 경험했다"]]고 발언하며 소신을 지켰다. 사실 '빨갱이 왕자'는 비꼬려고 만든 별명이고, 다카히토 친왕은 그 외에도 [[별명]]이 많긴 했다. 어릴 땐 글솜씨가 있어서 '''[[동요]]의 왕자님(童謡の宮さま)'''으로 불렸고, [[다이쇼 시대]]의 시 작품에는 작곡가가 곡을 붙여서 레코드로 취입한 적이 있었을 정도. 1957년에는 아내 [[유리코 비]]와 함께 <첫눈(初雪)>이라는 [[하이쿠]] 모음집을 내기도 했다. 아울러 춤에도 일가견이 있어서 '''[[왈츠]]의 왕자님'''으로도 불렸다. 유튜브를 찾아보면, 다카히토 친왕이 무도회에서 왈츠를 추는 장면이 실려 있는 극장 상영판 1950년대 일본 뉴스도 있다. 이러한 연유로, 그가 갖고 있던 직함 가운데는 일본레크리에이션협회 총재도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