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단두대 (문단 편집) == 발명자를 죽인 발명품? == [[기요틴|조제프이냐스 기요탱]] 박사는 위에서 말했듯이 단두대를 발명한 사람이 아니며 단두대에 사형을 당한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기요탱은 [[귀족]]임에도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지 않았는데, 혁명의 시작인 '[[테니스 코트의 맹세]]' 당시에 삼부회 의원들이 모일 수 있는 장소를 직접 마련해주는 등 혁명을 지지하였기 때문에 무사했다. [[프랑스 제1제국|나폴레옹 정권]] 시절에도 고위직으로 잘 살다가 당시 기준에서 상당히, 그리고 현재 기준으로도 나름 장수한 76살까지 살다 갔다. 기요탱이 이 법안을 만들었다는 것부터가 그가 인권과 평등을 매우 중요시하는 사람임을 증명해 준다.[* 본래 기요탱은 [[예수회]] 신자로, 사형제 폐지론자였다. 혁명으로 인해 전보다 유례없이 사형이 늘어나자 그나마 타협하는 방안으로 돌아선 셈이다.] 그는 본래 의사 출신으로 단두대 도입 외에도 보건, 의료 분야에서 활동하며 위생 및 의료 개혁에 힘썼다. [[에드워드 제너]]가 개발한 [[종두법]]의 개발 및 접종 보급을 지원하기도 했다. 1861년에 쓰인 영국 소설 《필립의 모험》(윌리엄 M. 새커리 지음)에도 기요탱은 단두대에서 사형당했다는 대목이 나오는 것을 보아, 오래 전부터 이런 설이 전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19세기 프랑스나 유럽에선 그가 단두대에서 사형당했다는 소문이 워낙에 정설로 전해져서 불쾌해 하던 기요탱 집안은 기요틴이라는 이름을 바꿔 달라고 소송을 제기했으나, 실패하면서 성을 아예 갈아 버렸다고 한다. 사실 단두대를 발명한 사람은 외과의사인 앙투안 루이(Antoine Louis, 1751~1825)이다. 처음에 불리던 단두대의 이름인 루이제트(louisette)는 바로 그의 이름을 따서 부르던 이름이다. 루이는 아이디어를 고안했고, 다른 6명의 기술자들이 여러 번에 걸쳐 만들고 개량하여 완성한 것이다. 물론 루이를 비롯하여 7명 어느 누구도 단두대에서 처형당하지 않고 다들 제 명대로 살다 갔다. 또한 발명자가 [[쳄발로]]와 [[피아노]]를 만들던 악기장인인 토비아스 슈미트에 관한 이야기가 있는데, 슈미트는 발명자는 아니고 기요탱의 제안과 루이의 설계를 받아서 맨 처음 단두대의 원형 1호를 만든 제작자이다. 즉, 전술한 기술자 6명 중 한 사람이며, 최종적으로 루이가 슈미트의 도면을 채택하여 단두대의 원형 1호를 선보인 것이다. [youtube(42CYEOi2QiQ)] 단두대의 칼날 부분의 문제를 지적하는 루이 16세(프랑스 혁명 200주년 기념으로 제작된 1989년 영화 <프랑스 혁명>의 한 장면이다) 단두대의 발명자가 단두대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이야기는 사실 이것 말고도 있다. 처음 개발된 단두대는 날이 반월 모양이었는데, 기요탱 박사는 이것을 국왕의 측근들에게 보여주면서 앞으로 힘 안 들이고 사형을 집행할 시대가 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다가 [[루이 16세]]가 직접 그 축소모델을 시찰하게 되었는데, 반월형 칼날을 본 루이 16세는 "이렇게 반월형이면 중간에 목뼈가 걸려서 쉽게 안 죽을 뿐더러 처형했을 때 죄수가 고통스럽게 죽게 된다. 그러니 이렇게 대각선으로 기울어진 칼날로 교체하도록 하여라."라고 명령했다. 이는 오랜 기간 열쇠와 자물쇠, 칼날 쪽에 취미를 두던 루이 16세의 전문가적 조언이었다. 쉽게 말해서 단두대의 최종 디자인 감수자는 루이 16세나 다름 없었던 것이다. '단두대의 발명자는 단두대에서 사형당했다'는 소문의 주인공은 어쩌면 루이 16세일 수도 있는 것. 물론 이는 왕실 일화 또는 [[야사(역사)|야사]]일 뿐 공식적으로 기록된 역사는 아니라는 말도 있다. 참 공교로운 일이지만 만약 사실이라면 그나마 적은 고통 속에 죽었을 것이니 루이 16세 본인에게는 결과적으로 반월형 칼날에 처형당하는 것보다 나은 일이 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족으로 [[앙투안 라부아지에]]도 이런 이야기가 있다. 단두대를 '발명한' 사람이 단두대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이야기는 확인된 바 없지만, [[공포정치]] 시기에 많은 사람들을 단두대로 보냈던 이들이 결국 자기들도 단두대에서 목이 잘렸던 것은 사실이다. 대표적으로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 [[루이 앙투안 드 생쥐스트]], [[조르주 당통]]의 예를 들 수가 있다. 혁명 당시에 자코뱅 당을 이끌던 수장격인 로베스피에르는 개인적으로는 강직한 사람이었으나, 정작 정치하는 자리에서는 극단적이고 엄격한 정치를 펼쳤으며, 귀족들은 물론이고 동료 정치인들까지도 반혁명분자로 의심된다면 모조리 단두대로 올려 처형시켰다. 결국은 [[테르미도르 반동]] 당시 재판에 회부되고 권총자살도 실패로 돌아가[* 자신의 턱 밑에 대고 머리 방아쇠를 당겼지만 고개가 뒤로 확 젖혀지면서 턱뼈가 박살나는 부상에 그쳤고, 결국 붕대로 턱을 고정한 채로 단두대까지 끌려갔다.] 최종적으로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 로베스피에르의 동료이자 공포정치 지지자 중 한 명이었던 생 쥐스트는 '단두대의 천사'라고도 불렸을 정도로 냉혹했는데, 처음엔 국민의 권리를 지켜야 한다는 개념찬 발언을 하던 사람이 나중에 가서는 혁명에 방해만 된다면 누구든지 죽여야 한다며[* 실제로 생 쥐스트는 혁명 초엔 '빵은 인민의 권리'라고 발언하며 혁명에 앞장섰으나, 이후에 '자유는 먹고 살 걱정이 없는 사람들이나 누리는 것'이라고 하다가 결국 '혁명의 반대파뿐만 아니라 중립을 지키는 자들도 처벌해야 한다'는 독설까지 할 만큼 극단적인 정치인이 되었다.] 극단적인 [[흑백논리]]까지 펴는 선동자로 [[흑화]]하였다. 심지어 로베스피에르더러 우유부단하다면서 더욱 열심히 사람들을 처형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는데, 그도 로베스피에르와 같이 [[테르미도르 반동]] 때 자신이 그토록 애용했던 단두대로 끌려가 공개처형 당했다. 국민들을 선동하여 혁명을 이끌던 조르주 당통 역시 로베스피에르와 생 쥐스트와 같이 활동했는데, 그 역시 극단적인 공포정치 지지자이며 사람들을 잡아다 처형하는 데 앞섰다. 그러나 당통은 뇌물수수 혐의와 반역 혐의로 인해 이들보다 먼저 단두대로 올랐고, 처형날 로베스피에르에게 "다음은 귀하의 차례다."라는 예언 같은 유언을 남기고 단두대에 오르기도 했다. 결론은 단두대를 개발한 자가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는 것은 근거없는 낭설이지만, 단두대를 앞장세운 로베스피에르, 생 쥐스트, 당통 같은 권력자들이 결국 자신들도 단두대에서 생을 마쳤다는 것은 후대에 남겨준 중요한 교훈이다. 여담으로 사형기구의 창시자 본인이 그 사형기구로 처형되었다는 이야기의 원조는 [[팔라리스의 황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