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당백전 (문단 편집) === 배경 === 당백전 문제는 심플하게 인과와 전개를 이해하기 쉬운 문제는 아니다. 그리고 당백전 이후에도 통화 정책의 실패인 [[백동화]] 문제의 뒤에는 대한제국의 귀금속 부족, 자금 부족, 일본의 방관 속에서 일어난 위조 문제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한반도에는 쓸만한 구리, 은 광맥이 없고 [[조선]]시대엔 사실상 구리 전량 수입으로 [[상평통보]]를 발행하는 상황이었으며 인플레이션 우려 탓에 고액권을 발행하는 일이 없어서 조선 후기 내내 심각할 정도의 전황(錢荒, =[[디플레이션]])이 일어나고 있었다. 상평통보는 조선의 [[국내총생산]] 3% 정도밖에 감당을 못했으니까 이건 거의 상시적으로 일어난 현상인데 [[쌀]]+[[면포]]가 보조화폐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19세기 후반이 되면서 [[영국]]의 [[산업혁명]]으로 인도의 목화와 영국의 기계로 대량 생산해낸 값싸고 좋은 [[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C%98%A5%EC%96%91%EB%AA%A9&ridx=0&tot=4|옥양목]]이 엄청나게 풀리기 시작했다. [[쇄국]] 정책으로 시간을 벌어 보기는 했지만 옥양목은 계속해서 들어오면서 면포 값을 폭락시켰고 면포+쌀+상평통보로 이루어진 조선의 화폐 체제는 붕괴를 면할 수 없었으니 이걸 커버치려면 면포가 감당하던 통화량을 화폐발행으로 대체해야만 하고 따라서 고액권 발행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당백전의 발행도 단순히 돈 없으니까 막 찍어내자는 무식한 생각에서 나온 건 아니고 이러한 경제사회적 맥락에서 이뤄진 것이다. 문제는 조선 조정은 고액권을 발행하고 운용할 재정, 경제적 지식과 실무적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