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기업/대한민국 (문단 편집) === 1997년 이전 === || 이름 || 비고 || || 건영그룹[* 건영 스스로는 그룹이라는 명칭을 쓰지 않고, '건영가족'이라 칭했다.] ||1977년 엄상호 창업주가 설립한 [[대구광역시|대구]]지역 건설회사 건영주택이 모태이다. 1990년대까지 지어진 건영아파트가 이 회사의 작품. 초기에는 건설업을 중심으로 사세를 신장했으나, 1990년대 들어 정보통신, 유통[* 서울 하계동에 있는 [[건영옴니백화점]]이 유통업 진출의 증거.], 레저, 농수산 등지에 이리저리 확장하다가 1996년에 부도나 해체됐다. 모기업인 건영은 여기저기 떠돌다가 LIG그룹에 인수되고 한보건설을 합병하여 LIG건영이 되었으나 LIG그룹이 핵심계열사를 제외하고 모두 매각되는 과정에서 다시 분리되었다. || || 광명그룹 ||1978년 이수왕 창업주가 설립한 [[대구광역시|대구]]지역 향토기업 '광명주택'을 모태로 하여 8개 계열사를 거느린 중견 재벌이었으나, 건설 경기 불황과 무리한 사채투자 등으로 1983년 부도가 나 해체되었다.([[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3110500099201013&edtNo=1&printCount=1&publishDate=1983-11-05&officeId=00009&pageNo=1&printNo=5438&publishType=00020|당시 신문 기사]]) 계열사 중 광명투자금융은 '경일투자금융'이 되어 제일은행 관리를 받다가 1987년 [[금복주]]로 넘어가 1996년에 '경일종합금융'이 됐으나, 1998년 퇴출되었다. 현재에도 대구광역시 곳곳에는 광명맨션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 || || [[국제그룹]] ||1948년 양태진과 양정모 부자가 설립한 국제고무공업사가 모태이다. 1980년대 초반 재계 10위권에 들었으나 무리한 사업 확장에 일해재단 후원금을 어음으로 내거나 정치자금을 적게 내는 바람에 정부에 찍혀서 부실 기업 오명을 쓰고 1986년 12월 해체됐다. || || 대봉그룹 ||율산, 제세, 원기업 등과 같은 1970년대 중후반 '신데렐라 재벌' 중 하나로, 1974년에 김병만[* 1955년생으로 우리가 아는 그 [[김병만|달인]]과는 동명이인이다.] 등 경복고/서울대 법대 동창들을 중심으로 '대봉산업'을 세운게 기원이다. 이후 대봉수산, 범철, 성진냉동, 협성항공화물, 더 플래스틱 등 6개 계열사를 세워 사세 확장을 했다가 밀어내기 연불수출로 인해 재고 급증에 자금난 등이 겹쳐 1979년부터 은행 관리를 받고 1980년에 소리소문없이 해체됐다. 또한 이 그룹의 계열사 중 하나였던 대봉정밀은 1978년 [[독일]] [[융한스]](Junghans Uhren GmbH)와 제휴하여 손목시계를 '콘스탄틴'이라는 브랜드로 생산했었다. || || 덕산그룹 ||1962년에 자양 박철웅이 설립한 고려시멘트[* 1989년 분리됨.]를 모태로 해서 1990년대 초중반 들어 광주광역시를 본거지로 하여 몸집을 키웠으나 1995년 광속으로 부도 릴레이를 맞으며 빠르게 사라졌다. 해체 전까지 무등건설[* ‘무등파크맨션’으로 유명했던 회사로, 지금도 광주시내 곳곳에서 그 이름을 찾아볼 수 있다. 90년대 당시 도급순위 전국 100위권, 광주전남에서는 4위의 큰 건설회사였는데 무리한 사업확장으로 자본잠식에 빠진 무등건설을 94년 11월에 덕산이 무리하게 인수한 탓에 반년도 채 가지 못한 95년 2월 덕산그룹은 연쇄적으로 부도를 내고 말았다. 때문에 사실상 덕산그룹 해체의 주원인이라고도 볼 수 있다.], 충북투자금융, 덕산콘크리트, 덕산요업, [[무등일보]] 등 24개 계열사가 [[http://news.kmib.co.kr/article/viewDetail.asp?newsClusterNo=01100201.19950228000000301|있었다.]] 다만 가계를 따져보면 '''[[http://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81843|사실상 조선대학교가 이 그룹의 모체였다.]]''' 역사가 좀 거시기한데, 재단 설립자인 [[박철웅]] 일가의 전횡을 견디다 못해 총학생회와 재야단체, 지역 여론이 이들을 끌어내렸고, 설립자 박철웅이 여기에 불복해 자신들의 존립 기반이었던 학교재단을 되찾고자 아들 박성섭을 내세워 언론사 설립과 여러 계열사 인수합병 등을 통해 어설프게 급조한 기업 집단이었던 것이다. || || [[동명그룹]] ||1925년 동명 [[강석진(기업인)|강석진]] 창업주가 세운 '동명제재소'가 기원이다. 1965년 당시 재계 1위 재벌이었고, 모기업인 [[동명목재]]는 해체 직전까지 세계적인 규모의 목재가공업체였다. 하지만 1979년 강정남 사장 이후 방만한 경영, 무리한 사업확장, 원목 수입가격 인상 등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국보위에 의해 1980년 6월에 해체됐다. 부산의 [[동명대학교]]도 동명목재그룹이 만든 대학교이며, 동명공업고등학교도 여기서 설립한 학교이다. || || [[라이프그룹]] ||1962년에 [[조내벽]] 창업주가 설립한 '한선기업'을 모태로 하여 1975년에 [[라이프주택개발]]을 설립하고 1970년대 중동건설 수주 및 아파트 개발 붐을 타고 빠르게 성장해 1980년대 들어 [[동방화재]], [[대한증권]], 라이프유통, 경주조선호텔 등을 각각 세우거나 인수하며 사세확장을 했으나, 1979년 제2차 오일쇼크 뒤 중동 붐이 꺼지며 자금난에 돌입해 1983년과 1984년에 동방화재랑 대한증권을 각각 현대그룹과 서울신탁은행에 팔았고, 1987년에 라이프주택이 산업합리화업체로 지정되었다. 이후 서울신탁은행 관리를 받으며 부동산 경기 침체에 노사분규로 상황을 회복 못하고 1993년에 그룹이 해체되었다. 이듬해인 1994년 11월에 여의도 구 사옥도 철거되었으며[* [[63빌딩]] 바로 옆 건물이었는데 [[남산외인아파트|남산 외인아파트]] 폭파 해체 바로 일주일 후에 똑같은 방식으로 폭파 해체됐다. 그러나 옆 건물 유리창이 박살나고 벽이 뒤틀리게 했으며 주차된 차에 먼지가 수북하게 쌓이는 등 여러 단점을 드러냈다.][* 철거 후 약 10년만에 [[여의도 금호리첸시아]]로 재건축되었다.] 라이프주택개발은 1997년에 폐업되었다. || || [[명성그룹]] ||1968년 김철호 창업주가 설립한 '금강운수'가 기원이다. 1976년 명성관광 설립 후 국내 관광 및 레저 산업의 선구자[* 명성그룹 [[김철호(1938)|김철호]] 회장은 관광, 레저 분야의 귀재로 불릴 정도로 그 옛날에도 혁신적인 레저 사업안으로 성공가도를 달리던 전도 유망한 사업가였다. 현재 국내 관광 레저 산업의 보편적 형태로 정착된 [[콘도미니엄]]은 바로 명성그룹에서 국내 최초로 도입하여 신드롬을 일으킨 것이다. 만약 김철호 회장이 진두지휘하는 명성그룹이 해체되지 않고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었으면, 국내 관광 및 레저 산업이 현재보다 더욱 높은 수준으로 발전했을 거란 의견도 있을 정도.]격인 재벌이었으나, 당시 정부에 의해 1983년 7월 크리스천 신문사 등 일부만 남긴 채 전격 해체됐다.[* 당시에 전두환의 장인 이규동으로부터 골프장 부지 고가 매입과 관련한 청탁을 받았으나 낮은 사업성을 사유로 거절했고, 5공 핵심 인사가 정치 자금을 요구했으나 이마저도 영수증을 달라고 하는 바람에 파토가 나면서 전두환에게 찍혀버렸다. 이를 빌미로 비협조적으로 나오던 김철호 회장을 죽여버리고자 2차에 걸친 강도높은 세무조사를 실시했는데, 김철호 회장이 난 억울하다며 국세청의 부당한 세무조사에 공식항의하는 문건을 '''4대 일간지 1면 광고'''로 실으면서 전두환 정권에 '''전면적으로 도전'''하는 셈이 되었다. 세무조사로 이미 금융권에서의 자금줄이 끊겨 고민하던 김철호 회장은 궁여지책으로 은행 돈을 가지고 지멋대로 불법 사채놀이를 하던 간 상업은행 직원한테서 자금을 공급받았는데, 이게 세무조사에서 걸려드는 바람에 김 회장은 그 은행 직원과 작당했다고 뒤집어 씌워 징역 15년형을 받는다. 하지만 재정적으로 건실한 기업체였던 명성그룹 계열사들은 이런 최악의 조건에서도 부도가 나지 않았고, 결국 5공 정권이 명성그룹 경영진들을 압박하여 억지로 부도처리 시키고 계열사들을 전부 헐값에 [[한화그룹]]으로 매각시켰다.[* 당시 민정계 정치인이었던 서정화와 사돈이었다.] 현재 [[한화호텔앤드리조트]] 산하 주요 숙박 시설들의 근원이 바로 명성그룹이다.] || || 범양상선그룹 ||1958년 박건석 창업주가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은 미륭상사를 모태로 하여 1966년 범양전용선을 설립해 해운업에서 성공을 거두었고, 이후 범양식품, 범양냉방, 한호항공, 범우운수 등을 서서히 설립하고 1984년에는 삼미해운과 세방해운까지 인수해 재계 순위 27위에 들다가 1987년 박건석 회장이 갑자기 자살해 범양상선 등이 법정관리로 넘어갔다. 반면 외아들 박승주는 미륭상사, 범양식품, 건영식품을 중심으로 재기하려다 2003년 부도 후 완전히 종말을 맞았다. || || 삼도그룹 ||1960년 김만중 창업주가 세운 '삼도물산'을 모태로 했다. 한동안 섬유와 의류업 중심으로 사업을 확장했으나 1995년 경영난으로 부도났고, 1998년 회사정리절차를 거쳐 그룹 해체 수순을 밟았다. || || [[삼호그룹(1932)|삼호(三頀)그룹]] ||1932년 의양 정재호-재찬 형제가 양말공장 '삼호막대소'를 세운 게 그룹의 기원이다. 1949년 삼호방직을 세우고 1953년 대전방직, 1956년에 조선방직 부산공장을 각각 인수해서 '방직 트리오'를 형성했다. 그 외에 1954년 뉴스통신사 '동화통신'을 세우고 1957년에 조선저축은행을 불하받고 1958년에 제일화재까지 인수하는 등 사업을 이곳저곳 확장해 재계 10위권 안에 들기도 했다. 이후 1961년 5.16 쿠데타로 부정축재자로 몰려 재산을 일부 환수당함에도 사업다각화를 계속 진행하다가 1960년대 말부터 하락세에 접어들어 1972년 [[8.3 사채 동결 조치]] 후 1973년에 '반사회적 기업'으로 찍혀 해체됨. || || [[삼호그룹|삼호(三湖)그룹]] ||1952년 [[조봉구]] 창업주가 세운 '동광기업'이 모태이며, 1954년 일주 [[이임용]]과 함께 '경남모방'을 세웠으나 1958년경에 이임용과 결별 후 독자적으로 소모방을 중심으로 사세 확장을 해나갔다. 1964년 한양컨트리클럽을 세우고 1974년 동광기업 개발부를 분리해서 '삼호주택'으로 출범해 아파트 건설과 중동 건설사업으로 사세가 신장됐다. 이후 1980년대 초반까지 삼호개발, 삼호유통 등을 설립하며 사업 다각화에 주력했다가 1984년 산업합리화 조치로 해체됐다. || || 삼화그룹 ||1934년 자명 [[김지태]] 창업주가 부산진직물공장을 인수한 게 그룹의 기원이다. 1934년 조선지기, 1943년 조선주철합자회사를 각각 설립하거나 인수하고 1945년 8.15 광복 후 1946년 아사히견직, 1954년 삼화고무 등 귀속재산을 각각 불하받아 사세를 신장시켰고, 1949년에는 부산일보를 인수하고 1959년 문화방송(현 부산문화방송)을 세워 언론사업을 키웠으나,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이듬해 부산일보와 부일장학회 등을 헌납하고 섬유 및 신발산업을 중심으로 버텨왔다. 1980년 이후 2세 경영으로 접어든 후 섬유업과 신발산업의 사양화 때문에 쇠퇴하여 1992년에 부도나 해체 수순을 밟았다. || || [[삼풍건설산업]] ||1963년 이준 창업주가 세운 동경산업을 모태로 한 소규모 기업집단이었으나,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를 일으키고 공중분해되었다. 이쪽은 도저히 쉴드치지 못할 정도로 일을 너무 크게 저지르는 바람에 산하에 있었던 학교법인 숭의학원([[숭의여자대학교]], 숭의여자고등학교, 숭의여자중학교, 숭의초등학교) 조차도 건지지 못하고 청산절차를 거쳐 1997년 폐업됐고, 숭의학원은 관선이사 체제를 거쳐 1999년에 [[영안모자]]가 인수하였다. || || 봉명그룹 ||서봉 [[이동녕(1905)|이동녕]] 창업주가 1947년에 설립한 '봉명광업소'를 모태로 한 기업 집단이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 2세 경영이 본격화되어 봉명([[이승무]]), 아세아(이병무/이윤무), 동창제지(이세무) 등으로 3분할되었다. 한편 봉명은 1991년 [[성균관대학교]] 경영에서 손을 떼었고, 1993년 도투락과 봉명산업이 부도를 내면서 해체되었다. 이후 1994년에 동창제지 역시 부도나 현재는 아세아그룹만이 건재하게 된 것이다. 참고로 도투락월드(1991년에 현재의 [[경주월드 리조트]]로 변경)가 봉명그룹에서 운영했던 놀이공원이다. || || 서주산업 ||1968년 [[윤석민(1938)|윤석민]] 창업주가 설립한 서원농산을 모태로 했다. 1973년 서주산업(西洲産業)을 세워 유제품사업에 진출하고 1978년 [[대한해운공사]]를 인수해 해운업 중심으로 사세확장을 거듭했으나 1987년 해운산업 합리화조치로 대한선주를 한진그룹에 팔았고, 서주산업 역시 법정관리를 받다가 1990년 정상화됐으나 1996년에 또다시 부도났다. 이후 1998년 효자원에 자산이 매각되어 1999년 파산했다. || || [[신진그룹]] ||1960년대~1970년대 초반 당시 국내 최대의 자동차 재벌이었고 건설업(현 [[삼성물산 건설부문]])까지 진출했으나, [[저우 4원칙]]으로 인해 [[토요타]]가 배신을 때리고 먹튀 하면서 몰락하기 시작해서 신진자동차공업은 신원개발을 흡수 합병하여 신원개발로 사명이 변경되었다가 삼성그룹으로 팔려가고, 이후에는 거화(구 신진지프자동차, 현 [[KG모빌리티]])의 부자 간 경영권 분쟁으로 인하여 흑자도산 하면서 팔려가 버리는 바람에 아예 그룹이 공중 분해되어 나락으로 떨어져 버렸다. 해체 후 신진자동차공업고등학교 1개교 규모에 불과한 학교법인으로 연명하면서 현존하고 있다.|| || 영동개발 ||1960년대 충남 온양에서 제일여관을 운영하던 이복례 창업주가 1970년대 들어 부동산 투기 및 사채업 열풍을 타고 1973년에 기업을 설립한 후 13개 계열사로 사업을 확장했으나, 무리한 사업확장으로 자금난에 시달리고 급기야 조흥은행을 매수해 은행 보증어음을 발행하다 1983년에 검찰에 덜미잡혀 해체됨. || || [[우성그룹]] ||1973년에 유연 최주호 회장의 4남 최승진이 설립한 [[우성건설]]을 주축으로 하여 1980년대 들어 '아파트의 왕'으로 칭송받던 대기업이었으나, 1990년대 초부터 무리한 사업 확장과 부동산 경기 침체 등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1996년에 부도가 났다. 이 기업을 한일그룹이 인수하려다가 외환위기 때문에 무산됐고, 그만 한일그룹 전체가 망해버렸다. || || 원기업 ||율산, 제세, 대봉과 같은 1970년대 '신데렐라 재벌' 중 하나로, 1976년에 율산실업 쿠웨이트 지사장이던 원길남이 원기업을 비롯해 원엔지니어링, 원해운 등을 주축으로 사세를 확장했으나, 자금난으로 1977년에 대표 원길남이 구속된 뒤 해체됐다. || || [[율산그룹]] ||3년 만에 흥하여 3년 만에 망한 재벌. 정주영 회장의 바지선 자재 운송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대담하고 기발한 방식[* 바이어들의 오퍼를 수주받은 물건을 수출할 때 국내에서 노는 선박을 자신들이 직접 임대해서 화주가 선주를 겸하거나, 사우디아라비아 법 체계의 허술함을 이용하여 화물선 선장실에 진압이 가능한 규모의 화재를 고의(!)로 일으켜 순서보다 훨씬 빨리 부두에 접안하여 물건을 내린다거나, [[전차상륙함]](!)에 물건을 실은 트럭을 임시도로가 깔린 해안에 상륙(!!)시켜 운송하거나 헬기(!!!)까지 동원하여 상품을 하역하는 등 현재 시점으로 봐도 상상을 뛰어넘는 각종 방법을 동원했다.]으로 바이어들의 오퍼를 수주하고 성과를 내면서 빠르게 성장[* 이 당시에 입사한 율산그룹 신입사원들의 입문교육은 다른 기업들과 달리 예술과 문학 등 각종 교양 교육이 중심이었다고 한다. 율산그룹의 구성원으로서 어딜 가도 당당할 수 있는 인문학적 교양과 품격을 갖추게 하기 위해서였다고.]했었지만, 부채가 너무 많다고 해산당했다. 망한 뒤 [[센트럴시티]]로 재기하는 듯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건설 과정에서 생긴 부채를 갚기 위해 지분의 60퍼센트를 외부에 매각했었다. 그리고 그 지분은 애경그룹, 통일교를 거쳐 [[인천종합터미널]]을 롯데에게 뺏기고 이를 갈던 [[신세계그룹]]이 인수해 계열사로 흡수했다. 전성기에는 [[석촌호수]] 부지를 소유했었으나, 그룹 해체 후 (주)한양을 거쳐 1984년 롯데에 넘어가서 1989년에 [[롯데월드 어드벤처|지금은 우리가 아는 그 놀이동산]]이 되었다. ([[http://www.donga.com/docs/magazine/new_donga/200012/nd2000120220.html|참고]]) || || 제세그룹 ||1974년에 젊은 기업가인 이창우가 '사업으로 세계를 제패한다'는 일념으로 세운 제세산업을 모태로 하여 삼각무역으로 번성한 기업집단이었다. 그러나 1978년에 건설업 진출을 위해 인수한 부실기업 대한전척이 부도로 면허가 취소되면서 급격히 재정난에 빠져 부도가 나 금세 사라졌다. || || [[태창그룹]] ||1907년 시전상인 출신 백윤수가 세운 '백윤수상점'이 모태이며, 1916년 대창무역을 세워 주식회사 형태를 갖추어 무역업을 주로 하다가 1924년에 대창직물을 세워 견직업에 나섰다. 그해 백윤수 창업주가 사망하자 장남 백낙원에게 넘어갔으나, 1939년에 백낙원이 죽고 막내동생 [[백낙승]][* 세계적으로 유명한 비디오 아티스트 故 [[백남준]]의 부친.]이 승계해 일제 말기 조선총독부의 비호로 번영을 누렸다. 1945년 8.15 해방 후 반민특위 체포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정권의 비호로 1950년대 10대 재벌로 이름을 날리다가 1956년 [[백낙승]] 사장 사후 경영이 어려워져 1961년 파산됨. 이후 태창방직은 1963년에 서갑호로부터 인수되어 현재의 [[방림(기업)|방림]]이라는 사명으로 존속중. || || 한신공영그룹 ||1950년 김형종 창업주가 설립한 '한신축로공업사'를 모태로 한 건설특화 기업집단이었다. 1983년 김형종 회장 사망 후 해외 건설시장 악화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아들 김태형 회장의 주도로 유통업 확장, 일부 계열사 정리, 주택사업 강화 등으로 재기했다가 1997년에 부도를 맞고 해체되었으며 건설사업부문은 2002년에 코암시앤시개발에 매각됨. || || [[한양그룹]] ||1969년 배종렬 창업주가 설립한 '한양목재'를 기반으로 한다. 1973년 한양주택개발을 설립해 강남개발과 중동건설 붐에 힘입어 1980년대 초반에 계열사를 7개나 가졌으나, 이후 중동 건설경기 침체로 인해 산업합리화 대상으로 지정되어 4개 계열사로 줄었다. 그럼에도 주택경기 활황으로 다시 역전했다가 신도시 아파트 부실 시공 파문 등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 1993년 부도로 해체됨. || || [[화신그룹]] ||1926년 유재 [[박흥식]] 창업주가 세운 선일지물이 그룹의 시초였다. 1932년 화신상회를 인수해 유통업에 뛰어들어 '[[화신백화점]]'으로 개편해 이름을 날렸고, 1944년 조선비행기공업을 설립하는 등 일제에 많이 협조했다. 해방 후 반민특위 체포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까지 재계 10위권에 자리잡았으나 사세가 점점 악화되어 1980년 부도로 해체되었다. 현재 기존 오너 가문은 흥한재단과 광신학원만 지켜냈다.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