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만군 (문단 편집) === [[중화민국|대륙 시절]] === 중화민국 국군은 [[쑨원]]에 의해 조직되기 시작하여, [[장제스]]에 의해 조직구조가 가다듬어졌는데, 이것을 '[[국민혁명군]]'이라 불렀다. 당시 중국을 자국편으로 끌어들여 제국주의의 포위망을 뚫으려는 [[소련]]의 인적, 물적 지원으로 [[황포군관학교]]가 세워졌고, 여기서 배출해 낸 장교들이 국민혁명군의 기둥이 된다. 장제스는 이런 자원을 가지고 [[북벌]]을 개시하였으며, 중국 전역의 [[군벌]] 세력을 정리하고 중국을 [[통일]]하였다. 군벌 세력들은 투항하면서 자신의 군대를 국민혁명군에 형식적으로 편입시켰으나, 실제로는 투항한 군벌 세력은 국민정부에 속한다는 것만 내세웠고, 이전과 마찬가지로 중국 각지를 할거하면서 자기 병력을 지휘하고 있었다. 이런 군벌군 소속을 합한 국민혁명군은 200 ~ 300만에 이르는 대병력이었으나, 실제로 중앙정부의 명령을 받는 장제스 직속의 부대는 약 30만명에 불과했다. 실제로 1920년대 [[몽골]]이나 [[시베리아]]에 있는 [[탄누 투바|투바공화국]]으로 침입한 중화민국 군대도 중앙군이 아니라 소규모군벌의 군대였고, 군벌군은 단지 중앙정부의 중요 방침이 내려오면 움직일 뿐 평시에는 군벌 수장들의 개인 경호원이자 사병집단에 불과했다. 히틀러 집권 전까지 독일과 중국은 군사교류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장제스 직속부대는 최신식 독일제 화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이런 장제스 직속부대는 우월한 장비에도 불구하고[* 사실 제대로 무장된 부대는 교도 사단을 포함한 8개 사단 10여 만 명 뿐이었고 그나마도 포병 전력이 빈약했다. 원래 처음의 계획으로는 1개 포병연대(3개 포병대대)를 직속으로 둬야 했지만, 시궁창같은 현실로 1개 산포대대(12문)으로 감지덕지해야 했을 정도였다.] 장교들의 무능 때문에 [[중일전쟁]] 초기 장강 유역 전투(난징, 상하이)에서 일본군과의 고전을 면치 못했고, 이렇게 직속부대가 와해된 장제스는 아무것도 못하고 임시 수도인 충칭으로 옮겨서 군벌들에게 일본군과 싸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군벌들은 자기병력이 분쇄되는 걸 아까워해 대체로 일본군과 싸우는 걸 싫어했고, 국민혁명군에 형식상 편입되었던 [[옌시산]] 같은 경우는 아예 일본군과 단독 강화를 맺을 정도였다.[* 다만 옌시산 같은 경우 하도 공산당이 뒤통수를 쳐서 일본에만 신경쓸 수 없었다는 변명거리가 있다.] 이런 내막에다가 당시 부패가 이루 말할 수 없던 점, 군대가 마을을 습격해 강제로 남자들을 끌어다가 징집해가는 사태가 벌어지자 마을에서는 자경단을 조직해 군대를 물리치는 지경이라 전투력이 제대로 발휘되기 힘들 정도. 더욱이 군벌을 중점으로 조직된 군대라 군벌들의 힘이 컸고, 이로 인하여 부정부패가 심각했다. 이는 나중에 중국군에서 복무한 몇몇 창군 초기 한국군 인사들에게서도 나타난 바 있는 문제였기도 했다. 의외로 장제스의 중앙군은 장비나 훈련 수준은 높은 편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직전까지 독일, 이탈리아 출신의 교관과 장비를 도입했고,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소련]], [[미군]]으로부터 장비를 지원받았다. 그런가 하면 공군 훈련장은 아시아 최대급으로 일본군조차도 탐내는 규모였다고 한다. 수적 우세와 장비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지지를 뿌리 끝까지 잃고 결국 패망한 점에서 [[베트남 전쟁]]의 남베트남과도 비슷하게 흘러갔다. 그리하여 [[국공내전]]에서는 인민해방군에 밀리다가, 결국 [[타이완 섬]]으로 쫓겨나게 된다. 섬에 고립되는 선택을 함으로써 스스로 국민당군의 잔당들을 본토에 버려두게 되었고, 버려진 국민당군들은 나중에 미얀마 국경을 넘어가 밀림지역의 군벌 등으로 변질되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