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만군 (문단 편집) === [[국부천대]] 이후 === 본토의 [[중국 공산당]]이 [[중국]]의 수립을 선포하는 와중에도 타이완 섬에서 오늘내일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러다가 중국이 민병대로 이뤄진 상륙대를 [[진먼]] 섬에 한 번 밀어넣어 봤다가 대만군에게 대패하여 잠시 물러나게 되었다. 진먼 섬에 물자 보급 임무를 수행하던 대만 해군의 상륙함이 물자 보급 외에 [[함장]] 및 승조원들의 필요에 의해 밀수를 하려고 출항 예정 시일을 넘겨 꾸물대다가 부근 어민들에게 징발한 목선을 타고 금문도에 상륙하려던 중국군 (기습상륙에 성공한 1차 상륙대의 보급품과 증원전력)을 발견하고는 탑재한 40mm 기관포로 사살해버린 사례(덕분에 1차 상륙대는 보급과 증원전력이 단절되어 결국 진먼 섬 수비대에게 패배를 했다)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 대만군이 여전히 막장이라지만 저런걸 상륙대라고 집어넣은 중국 공산군의 한심한 수준을 비추어볼 수 있는 일화이기도 하다. 이후 한동안 공산군은 해군을 양성하고 전투력을 혁신하여 대만 정벌을 준비하려다가 [[6.25 전쟁]]이 북진통일로 마무리되려 하자 상당수 병력들을 모두 [[중국 인민지원군|인민지원군]]으로 파견하는 바람에 대만을 공격하지 못하게 된다. 이후로도 가끔 분쟁이 일어났는데 [[진먼 포격전]]도 그 중 하나이다. 그러나 중국의 본격 대만 상륙작전은 계속해서 뒤로 미루어져서 현재에 이른다. 양안의 대립이 심각했을 당시 공군력, 해군력은 대만이 중국 공군력, 해군력을 압도했으며, 동맹국인 미국 해군 [[제7함대]] 규모나 오키나와/괌 등에 있는 수많은 미국 공군력을 고려하면 함부로 타이완 상륙작전을 실행했다가는 중국군이 오히려 곤란해지니 그렇게 대륙의 중국과 대만은 불안한 균형을 이룰 수 있었다. 장제스는 1949년 7월에, 대한민국의 진해(현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를 방문하여 정상회담을 했다고 한다. 당시 중국 대륙에서 타이완 섬으로 후퇴하는 도중이라 타이완 섬의 인구는 약 900만 명(잔존 대륙 영토의 인구는 5억 명)이었는데 군과 경찰+소방+교도 등은 각각 약 100만 명 수준이었다. 장제스는 주한미군을 대한민국에서 철수하니 [[대만 해군]]을 한반도에 주둔시켜 북한과 중국을 견제하는 방안을 제시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승만은 국민들의 여론을 고려해 반대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6.25 전쟁에도 소수이지만 200명이 참전해 40명이 전사했다. 한국전쟁 당시에 [[장제스]]는 중국군에 맞서 대만군을 투입하고 싶어했지만, 확전을 우려한 미국 정부의 반대로 실현되지 않았다. 당시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은 중국군 참전이 명확해지자 만주 폭격과 대만군 동원을 주장하다가 제3차 세계 대전을 우려한 트루먼 대통령한테 해임을 당했다. 대신 대한민국 [[화교]] 청년들이 [[대한민국 국군]]에 들어가 [[통역]]이나 [[심리전]] 요원으로 투입되었고 드물게는 전투병으로 가기도 했다. 일부 전선에서는 중국인들끼리의 전투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화교 참전전우회 소속의 참전용사들이 거의 세상을 떠났고 한국화교들의 70% 가량이 북아메리카나 대만으로 이주한 탓에 자료를 추산하기가 어렵다.[*출처 : 구술사료선집5 한국 화교의 생활과 정체성, 2007, 국사편찬위원회, p.37] 한국 화교들은 HID에 파견되어 교육을 받았고, 중화민국 국군 장교들이 기초군사훈련을 담당했다. 그 후에 HID 소속의 [[SC지대]]에서 근무했는데, 한국군 부대라서 중화민국 국군과는 관계가 없다. 중화민국 국군 장교들이 기초군사훈련을 한 정도다. 1960년대에는 대한민국과 대만의 공조 아래 중국인으로 가장하여 북한에 투입된 화교 출신 정보요원도 있었으며 한국군 요원이 대만의 대륙정찰대 요원과 합작으로 대륙 공작에 투입된 적도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와 대만 정부가 모두 이 문제에 무관심하고 대한민국 화교 인구가 적어 사회에서 반향 자체가 거의 없다. 같은 시기 [[베트남 전쟁]]은 남베트남의 반중 감정을 고려하여 군사고문만 파견하다가 전쟁 말기에 소수만이 직접 참전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