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우그룹 (문단 편집) ==== 대북사업 비협조설 ==== 당시 김대중 정부에서 추진하던 대북사업 자금이 모자라 기업에 협찬금을 요구했고 이에 삼성, 현대 등은 정권이 요구한 금액을 납부했지만 대우그룹은 이를 거부해 정권으로부터 미운털이 박힌 대우그룹에 마침 악재가 터지자 본보기로 정치보복을 하였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김우중 회장이 군사정권 시절 정치자금을 여당에 몰빵했던[* 이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이맹희]] 전 삼성그룹 부회장 회고록에는 '''정치권에 댈 "줄을 찾는" 과정에서 힘을 소모해 타격을 입은''' 몇몇 기업의 사례가 나와있다] 일부 기업과는 달리 여2 : 야1 의 방식으로 김대중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해 DJ와 친분을 쌓았으며, 무엇보다 김우중은 1990년대 초반에 김일성과 만나 '''독자적으로 대북 커넥션을 구축하는 데 성공'''한 사람이다.[* 김일성이 특히 김우중을 마음에 들어해 '''"김우중 같은 사람 5명이 있으면 그 나라가 일어날 수 있다"'''는 덕담을 해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협찬금을 냈다던 삼성그룹이나 현대그룹[* 현대그룹은 김대중 정부가 대북사업에 직접 나서기 이전인 '''1989년'''부터 대북사업을 추진했다.] 등 대우그룹을 제외한 30대 재벌 전원이 구조조정의 대상이 되어 '''5일만에''' 시행 계획안을 제출한 사실이 있다. 더구나,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은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 장치혁 [[고합그룹]] 창업주와 더불어 대북경협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현대그룹(1989년)보다 2~3년 늦게 대북사업에 뛰어들었지만, 빠른 행동력으로 초창기 남북경협을 대우그룹이 주도하게 된 것이다. 1992년 1월 남한 기업인으로는 두 번째로 북한을 방문해 무려 100만평 규모의 '남포공단' 투자 합의를 이끌어냈는데, 남포는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북한의 수도이자 핵심부인 평양의 위성도시이며, 서해로 나가는 관문이다. 남포공단을 조성하고 남한기업을 대규모로 유치하겠다는 결정은 '''남한으로 치면 인천을 통째로 북에 개방한 것과 마찬가지'''다. 사실 김대중 정권이 추진하던 [[개성공단]]도 위치만 남포에서 개성으로 바뀌었을뿐, 사업 내용이나 추진방식은 1992년 남포공단 합의와 똑같다. 민간 기업으로서 최초의 남북경제협력 사업으로 이후 북핵문제가 불거져 유야무야됐다가 1994년 제네바 합의 후 1995년 미국의 대북제재 1단계 해제가 이루어지면서 대북사업을 재개해 1996년 북한 조선삼천리총회사와 합자로 '민족산업총회사'를 세웠지만, 1999년 그룹 부도 후 이듬해 북한측이 직영하면서 철수했다. 이후에도 김우중은 독자적인 대북커넥션을 유지하면서[* 김우중은 대우그룹이 해체되고 해외를 떠돌던 2000년대에도 비밀리에 북한을 방문하는 등 대북사업에는 대단한 열의를 보인 인물이다.] 남북경협에 대단히 적극적인 인물이었는데, 대북사업에 소홀했다고 정권의 보복을 당했다는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다만 대우그룹은 이미 1996년부터 남포공단에 회의를 느끼고 철수를 고려했고, 김일성과 달리 김정일은 대우에 협조적이지 않은 태도가 있었다는 점은 고려해야 한다. 또한 [[정몽준]]은 [[16대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와의 단일화 토론 중 현대그룹이 대북 사업을 하는 대가로 시중에서 자금을 회수당하던 대우와 달리 34조원에 육박하는 공적자금을 지원받았다는 점을 지적받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