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장정 (문단 편집) == 의의 == > 홍군의 엄청난 강행군과 루딩에서 국민당군과 벌인 전투는 멋진 전설이 되어 중국인의 한 세대의 기억 속에 아로새겨진다. 훗날 루딩 전투는 ‘장정 가운데 가장 결정적인 사건’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만일 이날 강행군에 실패하고 전투에서 졌다면 홍군은 완전히 분쇄되었을지도 모른다. 첩보를 전달받은 양청우의 부대는 엄청난 강행군을 벌인 끝에 다음 날 새벽 루딩에 도달했다. > > > 루딩 다리는 길이가 약 110m이며 13가닥의 쇠밧줄로 이어져 있었다. 아래에는 드문드문 나무판자가 깔려 있었지만 양옆에는 밧줄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일찍이 어느 여행객은 아시아 지역의 고원과 중국 본토를 연결하는 이 다리를 보고 “인간의 기발한 재주가 만들어낸 가느다란 거미줄”이라고 묘사했다. 다리의 서쪽 나무 밑판은 국민당 군사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제거되었고 쇠밧줄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다. 다리의 동쪽 끝에는 높이가 약 6m 되는 돌벽이 축조되어 있었는데 가운데에는 루딩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었고 벽 위에는 기관총들이 설치되어 접근로를 통제했다. 양청우는 이때 상황을 간략하게 표현했다. “우리는 극복해야 할 여러 어려움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 > > 병사 22명이 자원하여 공격의 선봉에 나섰다. 1년 뒤 에드거 스노는 당시 전투에 참여한 생존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삼아 루딩 전투의 고전적 묘사를 남겼다. > > > “그들은 등 뒤에 수류탄과 마우저 권총을 동여매고서 곧 쇠사슬 다리를 향해 몸을 던졌다. 아래에는 급류가 흘렀다. 병사들은 쇠밧줄을 부여잡은 손을 교차하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홍군의 기관총은 적의 요새를 향해 불을 뿜었고 총탄이 교두보에 쏟아졌다. 이에 적군도 기관총 발사로 응수했고 저격병들은 쇠밧줄에 매달려 천천히 전진하는 홍군 병사들을 향해 총을 쐈다. 홍군 병사 하나가 총에 맞아 물속으로 떨어졌다. 또 한 명이 떨어졌다. 또 한 명이 떨어졌다. 아마도 쓰촨성 출신 병사들은 이러한 전투병들을 처음 봤을 것이다. 홍군의 젊은 병사들은 그저 밥벌이를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승리를 위해 목숨을 내걸고 전투에 임했다. 이들은 사람인가? 미친 사람인가? 아니면 신인가? 결국 홍군 전사 한 명이 쇠사슬 다리의 동쪽 밑판 위로 기어 올라갔다. 그는 수류탄을 꺼내 안전핀을 뽑고 적군의 요새에 난 구멍으로 정확하게 던져 넣었다. 국민당 군사 지휘관들은 다리의 모든 나무판자를 제거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이미 때가 늦은 뒤였다. 나무판자 위에 파라핀 기름을 급하게 뿌리고 불을 붙이자 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많은 홍군 병사가 쇠밧줄에 매달려 전진했고 나무판자에 붙은 불을 끄고 새로운 나무판을 깔면서 다리를 건넜다. 하늘 위에서는 장제스의 비행기가 엄청난 소음을 내며 빙빙 돌고 있었지만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 > > 실제 상황은 스노가 묘사한 것보다 조금 덜 극적이지만 그렇다고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돌격대가 “몸을 던져 손을 교차 하면서” 앞으로 나아간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게처럼 몸을 옆으로 돌린 다음 다리 양쪽에 있는 쇠밧줄에 매달려 이동했고, 그들의 뒤를 따라 다음 병사들이 나무판자를 하나씩 깔면서 움직였다. > > > 그러나 어떤 방식이든 간에 이들이 다리를 건넜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역사는 되풀이되지 않았다. 과거 태평천국군은 다두하에서 몰살되었지만 공산당군은 살아남아 다두하를 돌파했다. 6월 초에 홍군은 모두 강을 건넜다. 그들을 산 가운데로 몰아 포위하려던 장제스의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 > 필립 쇼트, 양현민, 마오쩌둥 1, 교양인, 2019, p.542~545 대장정은 중국공산혁명의 신화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를 차지한다. 마오쩌둥은 산시에 도착하여 대장정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장정은 진실로 선언서이며 선전대이며 파종기였다. 12개월 동안 공중에서는 매일같이 수십 대의 비행기가 우리를 정찰, 폭격하고 지상에서는 수십만의 대군이 우리를 포위, 추격, 차단하였다. 우리는 장정의 과정에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난과 장애를 겪었다. 그러나 우리는 두개의 다리만으로 2만 여리가 되는 거리를 걸어 11개의 성을 종횡단하였다. 장정은 진실로 선언서였다. 전 세계를 향하여 홍군이야말로 영웅적인 군대이며, 제국주의와 제국주의자들의 주구인 장제스의 무리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장정은 제국주의자들과 장제스가 시도하려 했던 포위, 추격, 차단의 파산을 선고하는 것이었다. 장정은 또한 선전대였다. 그것은 11개의 성에 사는 약 2억의 대중들에게 홍군이 가는 길만이 그들이 해방되는 길이라는 것을 선전하는 것이었다. 만일 장정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광범위한 대중이 홍군이 구현하고 있는 대진리를 그렇게 빨리 알 수 있었겠는가. 장정은 또한 파종기였다. 장정의 과정에서 우리는 많은 종자를 11개의 성에 뿌렸다. 그것이 언젠가는 싹이 트고 잎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어서 추수할 때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장정은 우리에게 승리였고, 적에게는 패배였다." 물론 이것은 중국공산당의 일방적인 장밋빛 선전에 불과하며, 대장정은 전술적으로는 (당시 국민당이 비웃었듯이) 병력의 90%를 잃어버린 기나긴 퇴각과 도주의 과정이었다. 대장정의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한 홍군의 수는 고작 3000여 명으로 추정되는데, 계속되는 전투와 필사의 각오로 탈주하는 과정에서 역량이 극도로 저하된 홍군은 대장정이 끝난 후로도 반격할 여력이 없어 국민당의 공격만 기다리는 상황이었다. 또한 간신히 피신한 서북 지역도 중국 본토에서 가장 척박하고 인구밀도도 희박한 곳 중 하나로서 도저히 장기적으로 혁명을 도모할 만한 곳이 되지 못하여 공산당 내부에서는 외몽골이나 신장으로 이동해 소련의 지원을 받아야 한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단지 [[서안 사건]]으로 토벌 직전의 상황에서 기사회생을 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략적인 관점에서 대장정은 중국공산당의 승리'''였다. '''어쨌든 중국 국민당은 중국공산당을 완전히 박멸하는 데에는 실패하였으며, 홍군의 핵심 지도부는 시련을 이기고 살아남아 후일을 도모할 수 있었다.''' [[마오쩌둥]]과 그의 정치/군사 이론을 중심으로 한 지도 체계가 그 유효성을 입증하며 확립되었고, '''중국공산당은 이를 바탕으로 [[국공내전]]에서 승리하며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