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정봉환 (문단 편집) === 토막파의 대응과 [[보신 전쟁]] === 대정봉환이 천황에게 상주된 그날, [[이와쿠라 도모미]]는 [[천황]]의 이름을 빌려 [[사쓰마]]-[[초슈]] 두 웅번에 밀서를 넣어 막부 타도를 명령하였다. 당시에는 이와쿠라 등의 토막(討幕)파가 조정 내의 주도권을 장악하지 못하였다. 대정봉환이 이루어지더라도 향후 열릴 새 정부(공무합체 정부)는 요시노부가 주도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따라서 토막파는 우선 쿠데타로 조정 내의 좌막파 중심의 섭정 및 관백 기타 기존 직책을 폐지하고 체제를 쇄신하여 조정의 실권을 장악할 필요가 있었다. 밀서를 받은 토막파의 실행은 요시노부의 대정봉환이 신속히 조정에 받아들여진 것으로 일단 연기되었으나 [[사쓰마]], [[초슈]], 게이슈(芸州)의 세 웅번은 다시 출병 계획을 짜고 [[토사]] 번 등을 포함하여 1868년 1월 3일 왕정복고령을 선포하였다. 제후회의를 주관하는 방식으로 권력을 놓지 않으려던 요시노부에게는 [[중세 일본의 관위와 역직#s-1.3|내대신]] 사직과 막부령 반납의 명령이 내려졌다. 요시노부는 일단 충돌을 피하기 위해 [[오사카성]]으로 옮겼지만 각국 공사들을 오사카성으로 불러 막부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한편으로 조정에는 내대신 사직과 막부령 반납의 조치를 좀더 낮추려고 여러 경로를 통해 애썼다.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결사항전을 주장하는 가신들을 진정시키고 다음 방책을 모색할 작정이었으며 신정부측도 그러한 점을 감안해야 한다고 생각해 얼마간의 여유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나, 막부와 전쟁을 할 생각을 굳힌 [[사쓰마]]번은 [[에도]] 시내에서 도발을 감행하고, 과격파의 사쓰마 토벌론이 격화되어 마침내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쿠와나 번, [[아이즈 번]], 막부군, [[신센구미|신선조]]를 동원하여 [[사쓰마]] 정벌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실질적인 목적은 교토를 봉쇄하여 신정부를 압박하고 정치적 우위를 되찾기 위한 공산이 컸다. 막부 출병의 소식을 들은 [[사쓰마]]-[[초슈]]는 크게 동요하였으나 신정부는 이 전쟁을 사쓰마와 막부 간의 사전(私戰)으로 보아 토벌령 선포를 거부했고, 동원령을 각 번에 내리도록 했지만 사쓰마와 초슈 이외에는 [[토사]]번의 일부 병력만이 출병하여 병력면에서도 크게 열세였다. 막부는 프랑스식의 전습대를 비롯, 총동원 15,000명이 가능했지만 유신 웅번 측이 당장 동원할 수 있는 것은 고작 3,000명에 불과했다. 따라서 웅번 측은 비상시에는 천황을 데리고 교토에서 탈출할 계획까지 세워놓고 있었다. 두 세력의 긴장은 점차 높아지며 결국은 토바-후시미 전투로 대표되는 [[보신 전쟁]]이 발생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