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학별고사 (문단 편집) ==== 1994년 ~ 1996년: 본고사+[[대학수학능력시험]]+[[내신]] 세대 ==== 1994년부터 본고사가 부활하여 서울대 등 최상위권으로 불리는 몇몇 대학교에서 치러졌다. 과외에 대한 우려가 많았지만, 이 3년간 의외로 지방의 평범한 평준화 고등학교에서도 아이들끼리 칠판에 일본 본고사 수학문제 풀면서 붙은 케이스들이 나왔다. 실제로도 현재 쉬운 수능 체제보다 이 당시 본고사 때 도리어 지방 출신 학생들이 많이 오기도 하였다. 이 시기 본고사를 치러본 세대들 중 일부는 과외로 되는 게 아니라 자신의 모든 걸을 던져야 하는 '진검승부'에 비유하고, 수학 한문제를 2~3시간에 걸쳐 고민하던 시절을 추억하기도 한다. 과목은 국어, 영어, 수학 위주의 교과 과목과 [[논술]]고사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대학별로 보는 과목이 달랐다. 서울대 같은 경우 본고사 40%, 수능 20%, 내신 40%였기 때문에, 수능을 만점 맞더라도 본고사 수학에서 한문제 망치면 떨어질 수 있다는 공식이 성립되었다 (서술형이라 부분 점수가 있음). 당시 수능 수석이던 배호필 군 같은 경우 수능 수석이라고 해서 좋긴 했는데, 가만 생각하니 본고사 망치면 말짱 꽝이란 생각에 수능 수석이 별 실속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 부분에 약간의 설명이 필요한데, 당시에는 [[특차]] 전형이라고 해서 수능시험+내신만으로 우선 선발하는 제도가 있었지만, 이때는 서울대만 유일하게 그 제도 없이 100% 정시모집만 하고 있었다. 따라서 만약 연고대라도 가겠다는 생각이 있었다면 본고사 걱정없이 수능시험 성적표를 들이미는 순간 합격이 보장되었으나, 서울대를 갈 생각을 했기 때문에 별 실속없다는 얘기를 한 거였다.(그 당시에도 현행 수시처럼 특차에 합격하면 정시모집 지원 자체가 금지였다.) 실제 당시 고득점자 중 본고사에서의 불확실성 때문에 그냥 안전하게 연고대를 넣어서 특차로 가는 케이스도 있었다. 특히 의대 지망생 중에서.] 그러나 논란이 많던 본고사는 1997학년도 신입생 선발부터 국립대학교는 본고사를 실시하지 못하도록 제도가 바뀌었다.[* 이와 동시에 [[수시]] 전형이 처음 신설되었다.] 한편 사립대학의 경우 강제사항이 아니었으나, 대부분의 사립대학들도 본고사를 자율적으로 폐지하였다. 원래는 시행전 폐지될 수도 있었지만 김영삼 당시 대통령이 수험생에게 혼란을 주면 안된다(...)는 이유로 3년간 진행된 것. 하지만 본고사 과목 중 논술은 폐지되지 않았고, 그것이 현재까지 수시시험에서의 논술고사로 이어져오고 있는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