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한뉴스 (문단 편집) === 탄생과 상영 === 1940년 '일본뉴스'가 시작되면서 조선에서도 정기적인 뉴스영화 제작이 시도되었다. 1941년 조선문화영화협회에서 '조선뉴스'를 제작하였으며, 1942년 조선의 모든 영화회사가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로 통폐합되면서 '조선시보'로 이름을 바꿔 월 1회 발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월 1회라는 제작 주기는 뉴스로서는 속보성이 떨어지고 기록영화로서도 영상기술이 조잡하는 등 평판이 좋지 않았다. 결국 1944년 이후로는 뉴스영화의 공급처는 '일본뉴스'로 집약되었다. 한편, 1943년 9월 22일 발행 조선시보 제11보가 러시아 국립 아카이브 고스필모폰드를 통해 영상이 발굴되어 남아 있다.[[https://www.youtube.com/watch?v=qYTIxVQ9ZP4|조선시보 제11보(1943)]] 광복 이후 미군정청 공보부 영화과에서는 1946년 1월부터 1947년 말까지 총 27호의 '시보'[* '조선시보'로 언급되기도 하는데, 남아 있는 영상을 보면 그냥 '시보'라고 되어 있다.]를 제작하였다. 미군정청 공보부의 '시보'는 [[미국국립문서보관소]](NARA)가 소장한 4편[* 제1, 2, 5호 및 특보]의 영상이 남아 있는데 서울 중앙청사 태극기 게양식, 미국 [[육군부#육군장관|육군장관]] 로버트 패터슨 방한, 미소 1차 정식회담, 남조선과도입법의원 개원식 등 역사의 중요한 장면을 영상 기록으로 남겼다. '시보'는 1948년 1월부터 '조선전진보'로 제명을 바꾸어 제작되었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해 11월 4일에 공보처 공보국 영화과가 발족되어 그 산하에 들어가면서 '대한전진보'로 개명되어, 흑백필름으로 월 1회 제작되었다. 이후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제작이 중단되었다.[* [[국립영화제작소]] 측은 미군정 공보부의 '시보'를 대한뉴스의 전신으로 간주하나 논란이 있다. 미군정 공보부의 역할은 이후 주한미국공보원(USIS)으로 넘어가 1952년부터 1967년까지 '리버티 뉴스'를 제작하게 되므로 '리버티 뉴스'의 전신이라는 주장도 있다.] 참고로 북한에서도 북조선국립영화촬영소에서 1948년 3월부터 '조선시보'란 이름으로 뉴스영화를 제작하였다.[* 현재 1948~1949년 제1~7호, 제11, 16, 21, 25호, 특보 제2, 5, 6, 8호 영상이 남아 있다.] 뉴스 제작은 피난정부가 있던 부산에서 1952년 1월 다시 시작되었다. 이때 다시 제목을 고쳐 “대한 뉴-스”라고 하였는데, 16mm 필름으로 월 2-3회 정도 부정기적으로 제작되었다. '대한 뉴-스'는 이동영사반이 지방을 돌면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상영되었는데 안타깝게도 이 시기 제작된 1호부터 21호까지의 원판은 서울 환도 과정에서 분실되고 말았다.[* 2016년 행정자치부에서 6.25전쟁 중 사라진 ‘대한뉴스’ 1호에서 21호(1952~1953년 생산)를 찾는 ‘기록 찾기’ 홍보활동(캠페인)을 추진하기도 했다.[[https://www.mois.go.kr/frt/bbs/type010/commonSelectBoardArticle.do?bbsId=BBSMSTR_000000000008&nttId=55782|#]]] 공식적으로 남아있는 기록은 1953년 6월 23일 22호부터다. 1954년(48호)부터는 [[외래어 표기법]] 개정으로 인해 이름을 \''''대한늬우스''''로 바꾸는데, 약 6년밖에 사용되지 않았음에도 그 쌈마이함으로 인해 현재까지도 회자되는 이름이기도 하다.[* 이 당시 외래어 표기법은 원어 발음을 살린답시고 [[오토바이]]를 --모오-타 싸이클이 아니라-- '오오토바이', [[도쿄]]를 '토오꾜오', [[뉴욕]]을 '뉴우요오크'(...)로 적던 시절이다. [[일본어]]로 번역된 외국 서적을 [[중역]]하거나, 그대로 가져와서 번역하는 일이 많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일본식 표기를 그대로 가져오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1990년대 이전에 출간된 서적이나 당대의 광고 문구를 보면 일본식 외래어 표기를 쉽게 볼 수 있다.] 이후 1957년 4월부터 본격적으로 한 주마다 제작되기 시작하였고, 1960년(275호)부터 '대한뉴우스'라는 이름으로 제작되다 1978년(1214호) 이후 '대한뉴스'라는 이름으로 정착되었다. 1980년 3월(1279호)에는 '카메라 순보'로 이름을 바꾸고 제작 간격도 월 2회로 줄어들었지만 3개월(1285호)만에 원래대로 환원되었다. 1972년부터 영화의 컬러화 시대에 따라 컬러 상영을 순차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하여 1977년 8월(1145호)부터는 컬러로 완전히 전환하였다. [[https://youtu.be/Dx2BJG9TprQ|대한뉴스 제 1008호 불조심]]처럼 흑백과 컬러가 섞여있는 뉴스도 있다. 여기엔 1974년 [[대왕코너 화재사고]]가 나오는데, 대왕코너 화재 사고는 1972, 74, 75년 세 번 일어났고 이 중 1974년이 가장 심각했다. 참고로 최초의 컬러뉴스는 [[1972년]] [[12월 27일]] 912호로, [[제8대 대통령 선거]]를 통해 당선된 [[박정희]]대통령 취임식과 [[임진각]]의 건설 소식을 다루고 있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Z7t5n0JHCd8|#]] 일부는 애니메이션으로 이루어진 대한뉴스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서울 올림픽 즈음에는 호돌이가 나와 공익광고를 하는 대한뉴스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당시 대한뉴스 중 일부분은 [[공익광고협의회]]에 제작한 공익광고가 들어간 것도 있었다. 해외 소식도 대한뉴스를 통해 많이 보도되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QlwSwRQfVMA|프라하의 봄]], [[https://www.youtube.com/watch?v=mnhOzo8Uuf0|나치 아돌프 아이히만 재판]], [[https://www.youtube.com/watch?v=PBlcyCQesrA|베트남 전쟁 발발]], [[https://www.youtube.com/watch?v=DZ35eyq3Itc|JFK 피격 사건]], [[https://www.youtube.com/watch?v=wFphTy-kfx8|베를린 대치]], [[https://www.youtube.com/watch?v=PRZtkSHhQCI|장개석 사망]], [[https://www.youtube.com/watch?v=cXB6z9BY4o0|베트남 쿠데타]], [[https://www.youtube.com/watch?v=TO9a2fVA8Qk|미국 유인로켓 발사 성공]], [[https://www.youtube.com/watch?v=dcJ7U2Eg4VM|아폴로 11호]], [[https://www.youtube.com/watch?v=zY5IvxqIBR4|도쿄 찌르기 사건]], [[https://www.youtube.com/watch?v=JWlkBpAmOPg|동독 반소봉기]] 등. 1958년도 뉴스의 국외 소식에서 "유니버살 영화사 제공"이라는 자막이 나오는데, 영상을 자체적으로 촬영할 사정이 안 되다보니 [[유니버설 픽처스]]가 [[https://catalog.archives.gov/id/100520|제작한 뉴스 영화를 수입한 것]]. [[프로파간다|독재 정부 선전수단]]이라는 비판을 많이 받았다. 제작 주체가 주체다 보니 독재정권에서는 그 나팔수 노릇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예를 들면 [[5.18 민주화운동]] 이후에 내놓은 [[https://www.youtube.com/watch?v=E-itJ1U-wLE|안정만이 살길]]에서는 [[5.18 민주화운동]]을 불순분자들이 조장한 폭동으로 보도했고, [[https://www.youtube.com/watch?v=h0w99hDtG6A|활기 되찾은 광주]]는 '폭동'이 끝난 후 광주의 평화로운 모습을 연출했다. 또한 [[전두환]] [[신군부]] 집권 후에는 항상 '[[땡전뉴스|대통령 동정]]'이란 제목을 '''무조건''' 첫 머리로 내보내야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