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한민국/외교 (문단 편집) === [[일제강점기]] === 20세기 전반기 한국인들에게 주어진 당면과제는 '''패권주의 정책을 펼치던 [[일본 제국]]에 맞서 독립을 되찾고 한반도에서의 근대적 주권국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초창기 독립운동가들은 나라를 잃은 상황에서 열강으로 도약한 일제에 저항할 방법이 마뜩찮았기에, [[미국]], [[유럽]] 등지에서 꾸준히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설파하고,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기대를 걸고 [[헤이그 특사]]를 파견하는 등 외교를 통한 독립 가능성에 주목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전국의 편에 서고, 서구 열강들이 동북아시아에서 일제의 우위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선회하면서, 20년대 말엽에 이르면 대부분의 평화적인 외교 독립시도는 실패로 판명나게 된다. 1920~30년대 일제는 러시아 [[적백내전]]에 대규모로 개입하고, [[중화민국]]의 분열을 틈타 [[만주 사변]]을 일으켜 괴뢰국인 [[만주국]]을 설립하였으며, [[노몬한 사건]] 등으로 [[소련]]과 영토분쟁을 벌이는 등 전방위적인 팽창주의 정책을 고수한다. 결국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일제는 교전 당사국인 [[중화민국]]·[[중국 공산당]]은 물론 반[[제국주의]]를 추구하던 [[미국]]·[[소련]]에게도 비난받으며 외교적으로 고립된다.[* 물론 일제는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 등과 [[추축국]]을 결성하며 국제적으로는 여전히 강력한 동맹을 확보하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 이래 독일과 이탈리아 모두 아시아 영토가 없었다. 소위 [[대동아공영권]]에 해당하는 아시아·오세아니아 지역에 영토를 보유했던 모든 주요국([[미국]], [[중화민국]], [[소련]],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들이 일제를 주적 내지는 잠재적 적성국으로 간주하였다.] 이에 따라 한반도의 독립운동가들 역시 반일 정서를 공유하던 [[중화민국]], [[소련]], [[중국 공산당]] 등과 연계하여 무장투쟁을 펼쳐나갔다. 개중 [[김구]]를 중심으로 한 [[우파]] [[민족주의]] 진영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중화민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한국광복군]] 등을 창건하였으며[* 이들은 [[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정부수립 과정에 기여하였으며, 단교 이전까지 한국과 대만 간 맹방관계의 기틀이 된다.], [[김원봉]]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아나키스트]] 진영에서도 [[의열단]], [[조선의용대]] 등이 활약하였다. [[소련]] 역시 [[공산주의]] 논리에 따라 [[코민테른]]의 이름으로 조선을 포함한 세계 각지의 독립 운동을 지원하였으며,[* 물론 대부분의 당대 열강들은 잠재적 적국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경쟁국의 식민지 독립운동을 지원·유도하곤 했다. 당장 일제가 [[대동아공영권]]을 주창했던 논리도 서구 열강의 침략에서 아시아를 보호해 주겠다는 논리였고. 그러나 [[소련]]의 경우 어쨌든 전간기에는 식민지가 없는 유일한 열강이었으며, 피식민지 독립운동가들 입장에서는 설령 숨겨진 의도나 목적이 불순하다 할지라도 당장 돈 들어오는 창구가 [[코민테른]]밖에 없었기에, 소련의 반식민 노선은 제3세계에서 많은 지지를 받았다. 물론 공산주의자들을 '''"레닌의 방귀구멍을 꿀물 핥듯 핥는 자들!"'''이라고 직접적으로 디스한 [[김구]]처럼, 일찍부터 [[소련]]의 의도를 간파하고 경계했던 독립운동가들도 적지 않았지만.] [[국공합작]] 이후 항일운동을 벌이던 [[마오쩌둥]]의 [[중국 공산당]] [[팔로군]] 휘하에도 상당수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활동하였다.[* 마찬가지로 이들은 [[광복]]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참여하였으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북중 간 혈맹관계의 기틀이 된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미합중국]] 역시 [[일본 제국]]의 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미국 사회에서도 반일정서가 광범위하게 확산된다. 덕분에 [[이승만]] 등을 필두로 재미 한인사회에서 한반도 독립과 일제의 위험성을 설파하던 목소리도 어느 정도 주목을 받게 되지만, 미국에게 정식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받는 수준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카이로 회담]]에서 열강 가운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인정한 유일한 국가는 [[중화민국]][* 오늘날의 [[대만]]]이었다. [[카이로 회담]]에서 태평양 전선의 두 대주주인 [[장제스]]와 [[프랭클린 D. 루스벨트|루즈벨트]]는 [[한반도]]를 [[일본 제국]]의 치하에서 독립시키는 것에 합의하였으며, 이는 [[1945년]] 일본의 무조건 항복 이후 현실이 된다. 그러나 루즈벨트는 한반도의 '''온전한''' 내지는 '''즉각적인''' 독립에는 큰 관심이 없었고, 관동군을 순식간에 궤멸시킨 [[소련]]의 남진에 맞서 최소한의 교두보를 확보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결국 [[미국]]이 [[38선]]을 제안하고 소련이 받아들이면서 한반도 분단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미국이 [[38선]]을 결정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북위 38도선이 [[한반도]]를 적당히 반분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고, 둘째는 그러면서 수도 [[서울]]이 미국령에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어디까지나 '''조금이라도 대륙 교두보를 확보만 할 수만 있으면 아무렴 어떠냐'''는 입장이었기에, 아직 한반도에 상륙조차 하지 못한 상황에서 소련에 과도한 요구를 할 경우 협상이 결렬되거나 불리해질 가능성을 두려워하여 최대한 보수적으로 제안했다. 그런데 정작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은 극동 참전의 대가로 40도선까지도 통제권을 양보할 의사가 있었고, 미국이 [[38선]]을 제안하자 덥썩 받아들였다. 당시로서는 미·소 모두 유럽이 동북아보다 우선순위였기 때문에, 동북아에서 조금이라도 '''더''' 양보하고 '''그 대가로 유럽에서 더 가져가려는''' 의도가 강했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그나마 그 동북아에서도 한국보단 일본에 훨씬 관심이 많았으며, 한국에 대해 아는 거라곤 [[서울]]이 수도라는 정도가 전부였던 것이다.(신복룡 (2001년 12월 20일). 〈미국은 당초 4대국 분할을 획책했다〉. 《한국사 새로 보기》 초 2쇄판. 서울: 도서출판 풀빛. 220~227쪽.) 결과적으로 보면 미국 입장에서는 [[냉전|조금 아쉬운]] [[미중 패권 경쟁|결과]]가 되었다.] 한반도는 수없는 희생에도 불구하고 끝내 자주적인 독립을 성취하지 못하였으며, 외세의 손으로 이루어진 독립은 [[남북분단]]이라는 또다른 비극을 낳은 채 오늘날까지 대한민국의 외교에 나쁜 쪽으로 엄청난 영향을 끼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