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한성공회 (문단 편집) === 외국인 선교사 시대(1890~1965) === || 순 || 이름 || 임기 || 비고 || || 초대 || 찰스 존 코프(Charles John Corfe, 한국 이름 고요한) || 1889년 11월 1일 ~ 1905년 1월 24일 || || || 2대 || 아서 베리스퍼드 터너(Arthur Beresford Turner, 한국 이름 단아덕) || 1905년 1월 25일 ~ 1910년 10월 28일 || [* 한국 YMCA(당시 황성기독교청년회) 3대 회장] || || 3대 || 마크 네이피어 트롤럽(Mark Napier Trollope, 한국 이름 조마가) || 1911년 7월 25일 ~ 1930년 11월 6일 || || || 4대 || [[https://youtu.be/NDtKypxKshw|앨프리드 세실 쿠퍼]](Alfred Cecil Cooper, 한국 이름 구세실) || 1931년 6월 11일 ~ 1956년 1월 16일 || [* [[한국전쟁]] 당시 납북되어 석방되기 전까지 보좌주교였던 아서 어니스트 채드웰(Arthur Ernest Chadwell, 한국 이름 차애덕)이 주교직을 대리.] || || 5대 || 존 찰스 데일리(John Charles Daly, 한국 이름 김요한) || 1956년 1월 17일 ~ 1965년 5월 26일 || [* 마지막 성공회 한국교구 주교 및 초대 대전교구 주교] || 1890년 9월 29일 [[영국]][[성공회]]의 찰스 존 코프 [[주교]]가 [[신부(종교)|신부]] 5명과 [[미국]] [[펜실베니아]] 출신 [[의사]]로서 의료선교를 하는 일라이 바 랜디스(Eli Barr Landis, 한국 이름 남득시)와 함께 입국하면서 대한성공회의 역사가 시작된다. 한국인 교인이 한 사람도 없는 상황에서 [[주교]]가 선임되고 한 교회가 시작된 것으로, 이는 세계교회사에서도 흥미로운 일이다. 그 전에 알렉산더 크로프트 쇼(Alexander Croft Shaw)나 존 리처드 울프(John Richard Wolfe) 등의 선교사들이 한국을 방문해 선교를 하거나 미사를 집전하기도 했었지만, 성공회는 주교제 교단으로서 주교 및 교구가 교회의 기초가 되므로 공식적인 대한성공회의 시작은 1889년 한국 주교로 서품된 코프 주교가 한국에 입국한 1890년 9월 29일로 잡는다. 이때 교단의 이름은 조선종고성교회(朝鮮宗古聖敎會)였으나 나중에 조선성공회 및 대한성공회로 이름을 바꾼다. 1891년 오늘날 [[인천]] 중구 내동에 첫 성공회 교회인 내동교회를 설립한다.[* 내리감리교회와 같은 동네에 있다.] 한국에 진출한 성공회는 [[대한제국]] 시기 서구식 근대 교육 보급이 일환으로 [[충남]] [[천안]]에 신명학교를 설립했으며, 의료선교를 위해 인천·여주·진천 등지에는 [[병원]]을 설립했고, 고아를 돌보기 위해서 [[경기도]] 수원·안중 등지에 [[보육원]]을 설립했다. 하지만 성공회가 세운 병원들은 1930년대까지 차차 모두 매각되거나 폐원되었고, 학교 및 보육원 또한 해방 후 국가의 공교육 정비 및 원생 감소로 인한 폐원으로 차차 사라졌다. 1900년 [[강화군]] [[강화읍]]에 [[강화성당]]을 세웠다. 서구 [[바실리카]] 양식과 [[불교]] [[절(불교)|사찰]] 양식을 조합해서 세운 이 [[성당]]은 초기 성공회 [[선교사]]들의 토착화 의지를 보여 주는 증거물이다. 이렇게 성공회는 [[선교]] 초기부터 [[한국 문화]]의 토양에 뿌리를 내리기 위한 토착화에 힘썼다. 그래서 한국 건축 양식인 [[한옥]]으로 건축한 성공회 교회들이 지금도 [[강화군]] 강화읍([[강화읍성당|강화읍교회]]), 강화군 온수리(온수리성당, 1906년 완공.), 청주시 수동(수동성당, 1935년 완공.) 등에 남아 있다. 1908년 첫 [[한국어]] [[공동기도문]]을 발간하였다. [[영국]] 성공회 1662년 [[공동기도문]]을 번역했으나 축성경만은 1549년 것을 채택했다. 1914년 [[강화도]]에 지금의 [[성공회대학교]] 전신 성 미가엘 신학원을 세웠다. 1915년 한국인으로서 처음으로 성공회에서 세례를 받고 전도사가 된 김희준(마가[* 복음사가 성 [[마르코]]를 예전에는 [[마가]] 내지 [[말구]]라고 불렀다. 개신교에서는 지금도 '마가'라고 부른다.]) 신부가 최초로 [[한국인]] 성공회 사제가 되었다. 김희준 신부의 집안은 대대로 성공회를 믿으며 오늘날까지 성공회 신부를 배출하고 있다. 1919년 [[3.1 운동]] 중 병천교회와 부속학교 신명학교가 [[태극기]] 제작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강제 폐쇄당했다. 1924년 부산 중구 대청동에 [[대한성공회 부산주교좌성당|대청동성당]]을 세웠다.[* 이후 1974년 부산교구가 대전교구에서 독립하면서, 대청동성당은 부산교구를 치리하는 [[대한성공회 부산주교좌성당|부산주교좌성당]]이 된다.] 1925년 [[영국]][[성공회]] 성 베드로 수녀회의 지원으로 [[성가수도회|성가(聖架) 수녀회]]가 설립되었다. 1926년 서울 중구 정동에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서울주교좌성당]]을 세웠다. 1936년 천주교, 감리회, 재림교회, 성결교회, 구세군과 함께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152610|신사참배를 시작하였다.]][* 1938년 [[장로회]]마저 신사참배의 압력에 굴복하였다. 이때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조선예수교장로회에서 나온 장로회 교인들이 해방 후 '''[[예장고신]]'''이라는 분파로 나누어졌다. 고신은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믿음을 지켰다. 예수교장로회 수많은 교단 가운데 분리 명분이 가장 마땅하고 옳았던 교단이지 않을까 생각된다.][* 신사참배를 교단 차원에서 끝까지 거부한 것은 [[침례회]]의 전신인 동아기독교가 유일했다. 동아기독교는 교단이 해산되고 목사 32명이 투옥되어 고초를 겪는 등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1940년 일제에 의해 조선성공회 4대 주교 세실 쿠퍼(한국명 구세실)와 영국인 선교사들이 추방되고, 성 미가엘 신학교가 폐교당했다. 이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었고, [[영국]]은 [[일본 제국]]의 적국이었다. 일제는 국내에서 활동 중인 [[영국인]] [[신부(종교)|신부]]들과 영국성공회 소속 조선성공회를 방치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때 조선성공회는 일본성공회에 강제로 편입되어, 당시 한국에서 일본인 성공회 신자들을 사목하고 있던 쿠도 요시오(工藤義雄, 요한) 신부가 주교[* 정확히는 쿠퍼 주교를 대신하는 관리주교]를 역임했다. 그러나 이 서품은 교회법상 불법이므로 쿠도 요시오는 대한성공회의 역대 주교로 인정받지 않는다.[* 어차피 이런 꼴을 당할 줄 미리 알았더라면, 불과 4년 전 [[야훼|하느님]] 앞에 큰 죄를 지으며 굴욕적으로 신사참배를 받아들이는 어리석은 짓은 안 했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악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하면, 그 악은 차츰 더 큰 대가를 요구한다"는 것을 역사는 가르쳐주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2015년에는 [[http://www.christiandaily.co.kr/news/%EC%A0%84%ED%9B%84-70%EC%A3%BC%EB%85%84-%EC%9D%BC%EB%B3%B8%C2%B7%EB%8C%80%ED%95%9C%EC%84%B1%EA%B3%B5%ED%9A%8C-%ED%95%A8%EA%BB%98-%ED%99%94%ED%95%B4%EC%99%80-%ED%8F%89%ED%99%94%EB%A5%BC-62243.html|대한성공회와 일본성공회 간 메시지 교류가 있었다.]]] 1945년 [[광복]] 후 일제에 의해 추방당했던 쿠퍼 주교 및 선교사들이 귀국하여 교단 조직과 성 미가엘 신학원이 재건되었다. 대한성공회가 1945년 [[광복]] 당시 [[일본]]관구 소속이 아니라 [[영국]]의 캔터베리관구 소속이었던 것은 천운이었다. 다행히 성당과 기타 교구 재산이 [[적산가옥]]으로 취급되어 몰수되는 상황을 비켜갈 수 있었다. 이에 반해, [[정교회]] 한국교구는 당시 일본정교회 소속으로 되어있었기 때문에 [[광복]] 후에 교회 재산이 모두 [[적산]]으로 분류되어 몰수되는 날벼락을 맞았다. 1950년 [[한국전쟁]] 중 [[서울주교좌성당]] 주임사제이던 윤달용(모이서[* [[모세]]의 예전 번역명.]) 신부를 비롯한 성직자 7명이 [[조선로동당]]에 의해 순교했다. 희생된 성직자 중 윤달용(모이서) 신부는 자발적으로 독신을 지켰던 사제로 당시 천주교로 교단을 옮길 뜻을 밝히고 이를 준비하고 있었다. 쿠퍼 주교 또한 납북되었다가 구사일생으로 남한으로 복귀하였다. 한편 [[한국전쟁]]으로 [[북한]]의 교세를 모두 상실하고, 한때 신자 1만여 명에 달하던 교세도 완전히 무너져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이때까지 한국에 왔던 성공회 외국인 [[선교사]]들은 모두 잉글랜드성공회의 고교회파 선교단체인 USPG(United Society Partners in the Gospel) 소속으로 앵글로-가톨릭 성향이 매우 강했기에, 성공회 신부라면 응당 가능한 결혼도 하지 않은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순교한 윤달용 신부 또한 미혼자였으므로 천주교로의 회심을 진지하게 준비하고 있던 것이었다. 이 때문에 당시 대한성공회는 매우 강한 앵글로-가톨릭 성향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1970년대까지는 전례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천주교와 매우 유사했고, 당시의 천주교나 정교회처럼 성공회 신자는 반드시 성공회 사제에게만 성사를 받을 수 있었고 견진자가 아닌 영세자는 미사 때 말씀의 전례가 끝나면 본당에서 나가야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