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항해시대 (문단 편집) === [[향신료]] === 대항해시대의 발생 원인 중 하나는 [[향신료]], 그 중에서도 [[후추]]가 지대한 비중을 차지했다. 비록 중반 이후부터는 너도나도 향신료 무역에 뛰어들어 수요보다 공급이 배로 급증하는 바람에 향신료 무역이 시들해져버리긴 했지만 대항해시대를 열게 만든 '''결정적 원인 중 하나였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말 그대로 대항해시대 원양항해가 막대한 돈과 시간, 심지어 '''목숨'''까지 걸어야 함에도, 한번 향신료를 가져오면 막대한 이득을 얻을 수 있을 만큼 당시 유럽에서의 향신료는 비싸게 거래되었다. 이는 국왕, 귀족을 비롯한 수많은 투자자들의 귀를 솔깃하게 할만한 요소가 되었고 덕분에 많은 탐험가들이 신항로 개척을 위한 재정적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물론, 향신료는 대항해시대 자체를 열게 만든 기폭제 역할이었으며, 대항해시대 중반부터는 개척된 항로를 바탕으로 무역이 과열되어 향신료는 예전의 메리트를 잃어버리고 만다. 그 이후부터는 새로 유럽인들의 시각에 들어오게 된 아메리카 대륙의 [[금]], [[은]], [[노예]], [[설탕]]과 같은 것들이 향신료 위치를 대신하였다. 흔히 알려져 있는 ~~[[먼나라 이웃나라]]에 있는~~ 설명은 오스만 제국의 성립이 지중해 향신료 무역을 막아버리고 이것이 대항해시대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시간 순서를 봐도 이것이 잘못된 통설임을 쉽게 알 수 있는데, 기존의 [[인도양]]-[[홍해]] 향신료 무역을 독점하고 있던 [[맘루크 왕조]]가 오스만 제국에게 흡수된 것은 '''1517년'''인데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에 도착한 것은 '''1498년'''이다. 이조차도 맘루크 왕조가 멸망한 원인 중 가장 큰 원인은 포르투갈이 인도양 항로를 봉쇄해서 맘루크가 향신료를 유럽에 팔 수 없게 되자 재정적자로 병사들의 급여가 밀려 병사들이 태업을 한 것이었다. 오스만은 기존의 지중해 무역을 원천적으로 차단하지는 않았다. 단지 특혜와 관세라는 [[당근과 채찍]] 전략으로 당시 지중해 무역의 주체인 제노바, 베네치아, 피렌체 등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을 견제한 수준이었다. 통계 자료에서도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오스만이 성립한 시기를 전후한 향신료의 가격은 크게 차이나지 않았다. 물론 그전이나 그 후나 향신료의 가격 자체가 높은 건 사실이나, 그 변화 폭이 두드러진 수준은 아니라는 것. 오히려 유럽의 향신료 가격 폭등은 맘루크의 멸망 직전인 1510년대의 현상이었다. (출처: 남종국, 비잔티움 제국의 몰락과 지중해 향신료 무역, 해항도시문화교섭학 제18호, 2018.04) 그럼에도 오스만의 동지중해 석권이 대항해시대 개막의 계기가 되었음은 틀림없다. 15세기에 오스만 제국은 끊임없이 유럽국가의 동지중해 거점을 차근차근 무력으로 정복하고 있었다. 시리아의 아크레나 크림반도의 조차지 같은 내륙거점은 일찌감치 털렸고, 그리스 반도, 크레타 섬 순으로 차근차근 정복당하는 과정에서 그 지역에 막대한 투자로 구축해놓은 방대한 무역거점이 다 날아간 결과 그리스 공국을 장악하고 있던 아라곤은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고, 베네치아는 완전한 쇠퇴의 길로 들어선다. 이 시기 동방무역로는 유지되었으나 베네치아의 거점에서 베네치아의 해군력에 의해 보존되는 교역로에서 오스만의 거점에서 오스만의 해군력에 의해 유지되는 교역로로의 변화가 생겼고, 이를 통해 술탄은 향신료를 대량으로 풀었기에 최종소비가격은 유지되었으나 중개수익은 고스란히 오스만의 손에 들어갔다. 이 중개수익은 단순 운송수익에만 한정한 게 아니라 그리스 공국 같은 해당지역 거점에서 사들이는 향신료 수익으로 요새를 유지하고 함대를 유지할 수 있었으나 이것이 오스만으로 이전된 결과 오스만 해군의 막대한 양적인 팽창을 가져왔고, 오스만군이 지속적으로 공세를 펼칠 수 있는 막대한 재정수입이 되었다. 이에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군사력을 유지할 수 있는 재정수입을 잃었기에 쇠퇴를 면치 못했으며 유럽국가들은 주적인 오스만의 전쟁자금을 쥐어주는 향신료 수입에 대한 재정적자를 막고 새로운 항로를 뚫어야하는 군사적, 재정적 필요가 존재했다. 이 지역거점이 있어야 한다는 측면 때문에 한번 가는 것도 힘든 포르투갈은 인도의 고아를 획득하고 막대한 인력을 상주시켜야하는 식민지를 세워 향신료와 같은 인도산 물자를 수입했고 비로소 안정된 선단과 교역로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배 한두 척이 잘 모르는 다른 지역에 무작정 간다고 물건을 대량으로 팔아줄 상인이 대기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며 만약 그런 물자와 그 물자를 지킬 군사력과 거점을 보존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운송업자보다 훨씬 막대한 수입을 올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잘 해온 향신료 무역이 어려워져서 신항로를 찾은 건 스페인 정도에만 해당하고, 오스만의 동지중해 석권 이전에도 영국이나 프랑스는 향신료 중개무역에 참여하지 못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들은 신항로 개척도 스페인에 비해 늦었다. 실제로 당대에도 포르투갈의 신항로 개척은 많은 이슈가 되었으며, 특히 [[베네치아 공화국]]은 해당 이슈에 매우 비관적이고 민감하게 반응했다. 자신들의 지중해 무역 패권은 몰락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 대다수였으며, 심지어 오스만과의 분쟁보다도 더 심각한 문제라는 평까지 나왔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포르투갈이 자신들의 경쟁자가 될 것임을 우려하여 여러 노력을 했으나, 포르투갈의 향신료 시장 참전 이후로는 오스만 제국의 프랑스 우대 정책, 향신료 덤핑 정책 등으로 인해 베네치아의 향신료 시장의 독점적 위치는 완전히 무너지고 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