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도검 (문단 편집) ==== 퍼포먼스 ==== 칼날 제조에 관해서는 [[http://odukhu.egloos.com/2898874|도검 제조에 관하여]] 와 [[http://odukhu.egloos.com/2891135|패턴 웰딩에 관해]]를 참고할 것. [[도검/강재|도검용 강재]] 문서의 [[도검/강재#s-3|평가 기준]] 문단도 참고할 것. [[청동기시대]]의 [[청동검]]은 절삭력과 내구도 모두 현대의 강철도검에 비하면 참담한 수준이었다. [[경도(성질)|경도]]는 [[로크웰]](Rockwell) 기준으로 [[HRC]] 20 이하의 매우 낮은 수준으로, 300계 [[스테인리스]] 부엌칼조차 30 정도의 경도를 가지는 것을 생각하면 과연 이것이 전투에 쓰였나 싶을 정도. 실제로도 이러한 이유로 초기 청동검은 전투용으론 사실상 쓰이지 않았고 제사용이나 지휘용, 지배층의 상징물로 사용했다는 설이 우세하다. 덕택에 초기에는 긴 장검조차 제작이 불가능했으며, [[주석(원소)|주석]]과 [[구리(원소)|구리]]의 배합률을 조정해 부드러운 부분을 심재로, 단단한 부분을 칼날로 제조하여 비로소 장검을 만들 수 있었다. [[파일:external/pds18.egloos.com/c0063102_4de477c0d4308.jpg]] ([[전국시대(중국)|전국시대]]의 [[청동검]] 단면) [[파일:gw.jpg|width=920]] (기원전 15세기경. [[미케네]] 시대 그리스 조각품) 그러나 발전된 형태의 [[청동검]]은 충분한 위력을 가진 살상무기였다. [[월왕구천검]]이 보여주듯이 날을 날카롭게 세울 수도 있었고, 종이 정도는 쉽게 자르는 절삭력을 가지고 있었다. 도검의 파괴력이 무게와 원심력에서 오는 걸 감안하면 청동검으로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건 쉬운 일이었다. 다만 재료의 한계상 칼날이 쉽게 닳아 절삭력을 잃어버리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도검이 [[강철]]제로 바뀐 이후에도 경도는 금방 올라가지 않았는데, 초기의 강철은 강재의 [[탄소]]량이 균일하지 못했고 같은 칼날이라도 부위별로 탄소량이 높은 부분이 산재하여 경도를 평균적으로 높게 올리면 특정 부분이 과도하게 딱딱해져 부러지기 쉬운 취성이 증가해서, 멀쩡하게 쓰다가도 뚝 부러질 염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 [[전한]]의 직도나 한국, 일본의 [[환두대도]] 등은 쉽게 부러지는 경향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등변삼각형 단면이라는 구조적 취약성 이외에도 이러한 문제를 포함하고 있었을 가능성을 점칠 수 있다. [[파일:/pds/200912/10/02/c0063102_4b1fc58a4fc55.jpg|width=600]] 실제 유물 도검들을 부위별로 찍어서 나온 경도 편차를 나타내는 그래프([[http://www.myarmoury.com/feature_bladehardness.html|출처]])를 보아도 현대 도검에서 사용되는 강재인 6150, 5160, 1075 고탄소강의 경도 편차는 매우 적게 나오는 데 비해, 아래의 실제 유물들의 경우 같은 칼날임에도 위치에 따른 경도 편차가 매우 심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나마 시대가 올라갈수록 경도의 평균최대치가 증가하는 것이 위안. 이러한 이유로 중세 초기에는 저탄소강을 중심에, 고탄소강을 칼날에 배치하는 방식으로 같은 열처리를 해도 칼날의 절삭력과 내구성을 한번에 얻고자 하였다.([[일본도]]와 같은 원리) 강재의 품질이 균일화될수록 이러한 방식은 점차 사라지고 칼날 전체에 탄성을 주는 열처리를 통해 휘어도 부러지지 않고 제자리로 돌아오게 함으로써 신뢰성을 갖게 하는 방식을 채택하면서 도검의 품질이 좋아진다. 다만 그만큼 경도를 희생하게 되면서 중세-르네상스 서양 도검은 경도가 평균 HRC38 정도를 유지했다. 이러한 복합강재 → 단일강재로의 전환, 부분열처리 → 통열처리로의 전환은 일본과 일부 지역을 제외한 전 세계적으로 이루어진 테크트리였다. 일본은 끝끝내 접쇠와 복합강재, 부분열처리를 고수했는데, 이것은 특별히 놀랍고 대단한 퍼포먼스를 낼 수 있는 기술이라서가 아니라 일본의 제철 환경 자체가 매우 불리했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모래 형태의 [[사철]]을 채취하여 이것을 전통 용광로인 타다라에서 재련, 녹아내린 쇠를 회수하는데 이것이 타마하가네(玉鋼)이다. 당연히 불순물이 엄청나게 많기 때문에 [[접쇠]]를 통해 불순물을 제거하게 되며, 탄소량도 불균일하다. 이것을 망치로 깨서 깨지는 성질을 보아 고탄소강과 저탄소강을 분류해서 쓰는데, 거의 눈대중으로 분류하는 것이라 강재 선별도 명백하지 않았다. 이런 시점에서 조금이나마 나은 퍼포먼스를 얻기 위해 강재를 차등배치하고 부분열처리를 가해서 칼날의 경도와 칼등의 연함을 동시에 얻고자 한 것이다. 중세 초기 유럽에서 쓰던 방식과 동일한데, 유럽은 강재의 품질이 올라가면서 그만둘 수 있었지만 일본은 끝까지 이 방식에서 정체되었다. 그렇다고 아주 튼튼한 것도 아니라서 전통일본도는 베다가 조금만 잘못해도 쉽게 휘고, 그 휘어진 것도 손으로 바로 잡을 수 있을 만큼 연했다.[* [[만철도]], [[일본도]] 문서 참조. 군도의 조법 1944년판 매뉴얼 3부에는 [[시참]]하다 휘어진 칼을 손으로 도로 펴는 요령도 기술되어 있고, 일본군 북지나방면군 군속으로 군도수리반을 이끌었던 [[나루세 칸지]]는 자신의 저서 「싸우는 일본도」 등에서 쉽게 휘어지는 일본도들에 대해 토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살상력이 낮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애초에 도검류의 절삭력은 무게와 원심력에서 나온 운동에너지가 칼날의 얇은 두께에 집중되면서 나오는 힘이다. 특히 일본도는 상기한 일본 특유의 불리한 제철환경을 극복하고자 칼날을 두껍게 만들었기 때문에 전통 일본도는 비록 약할지언정 무거운 검신을 잘 휘두르도록 하는 검술방식으로 인해 절삭력 자체는 서양인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강했다[* 다만 이는 당시 일본도를 접한게 무거운 양손검은 사장되고 가벼운 한손세이버 정도나 주력으로 휘두르던 근대 서양인들이라 옛 전투방식을 지니고 있는 일본도의 절삭력이 더 대단하게 보인탓도 있다. 아무튼 일본도는 길이가 짧아 간과되는 경우가 많지만 엄연히 양손검이고 무게도 그만큼 무겁기 때문에 한손검과 비교할수 없는 절삭력이 나옴은 당연하다.]. 현대와 비교했을 때 다소 낮은 품질이라고 할지라도 강철제 무기는 인간을 살상하기에는 차고 넘치는 무기였다. 에스파냐/포르투갈인들이 [[인디오]]를 학대하는 그림들을 보면 원주민의 팔다리를 뭉텅뭉텅 썰고, 아기를 거꾸로 매달아 일도양단을 함은 물론, [[난징대학살]]에서 일본군 장교용 군도들은 대부분 전통일본도를 가져다 외장만 군도로 바꿔서 썼는데도 약하다는 묘사들이 무색하리만치 간편하게 목을 치는 사진들이 많이 존재한다. 오히려 현대 강재로 만든 도검들은 베는 느낌이 좀 미끄럽다는 평이 있고, 대장간에서 만든 조선낫이나 부엌칼 등이 훨씬 쩍쩍 달라붙으며 잘 잘린다는 증언들이 있는데, 오히려 불순물이나 불균일한 탄소량 등이 마이크로 서레이션[* 서레이션은 톱날을 의미한다. 빵칼이나 스테이크 나이프--또는 [[장미칼]]--의 날을 연상하자.]과 같은 작용을 하여 그렇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