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도광제 (문단 편집) == 여담 == 아편전쟁 시기의 황제인지라 [[로마자]] 표기가 자주 나온다. 19세기 당시에는 Taou-Kwang[* [[난징 조약]] 영어 원문에도 이렇게 기재되어 있다. 특정 로마자 표기법을 따른 것은 아니고, 발음을 적당히 영어식으로 옮긴 표기.], 현대에는 Dao-guang으로 표기한다. 그는 매우 검소한 황제였다고 전한다. 황궁의 예산은 은 20만 전을 넘지 못하게 했고, 스스로 솔선하여 낡은 옷을 입었다. 이것이 유행을 탄 나머지 고관들도 모두 낡은 옷을 입고 나와 자신의 '''청렴을 과시'''했다고 한다. 나중에는 낡은 관복이 새 관복의 두 배 가격을 하고, 그마저도 구입하지 못해 새 관복을 열심히 해지게 하고 더럽히는 촌극이 벌어질 정도였다. 이런 '청렴 프렌들리 정책' 덕분에 무영전 대학사 조진용(曹振鏞)이 총애를 받았는데, 이 자는 채소장수와도 직접 흥정을 할 정도로[* 물론 장을 보는 것이 주제거리가 될 만한 일은 아니긴 하지만, 그렇다고 청 제국 대학사가 채소장수와 흥정을 하는 건 역시...] 쪼잔한 인물이었다. 청렴하단 이유로 고기야 무장가(郭佳 穆彰阿)라는 대신도 총애를 받았는데, 정작 그는 밖에서는 사치로 악명이 자자한 위선자였다. 청렴한 임금이 반드시 명군은 아니며, 군주가 청렴하다고 신하들까지 청렴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케이스. 비슷한 예로 [[명나라]]의 [[숭정제]]가 있다. 무영전 대학사 조진용(曹振鏞) 청나라 역사에서 본인에게나 타인에게나 절약으로 유명한 [[자린고비]]의 대명사로 유명하고 사치와 향락으로 유명한 고기야 무장가(郭佳 穆彰阿)도 본인 재산으로 사치를 했기에 황실 은고를 털었다는 천일야사 내용은 역사왜곡인 수준이다. [[천일야사]]에서는 도광제를 다룬 편에서 총애를 받지만 황실 예산을 긴축정책으로 유지한 무영전 대학사 조진용(曹振鏞)이 사실은 사치를 일삼은 위선자였다는 내용으로 방송을 했는데, 고기야 무장가(郭佳 穆彰阿)가 사치로 유명했다는 위선자라인 것과 혼합한 것이었다. 더군다나 고기야 무장가(郭佳 穆彰阿)도 본인 가문의 재산으로 사치를 했기에 황실 은고를 털었다는 내용도 실제 역사와 다르다. 무영전 대학사 조진용(曹振鏞)이 사치를 일삼은 위선자였다는 주장은 천일야사의 허구인데 정작 겉으로는 검소한 척 하지만 뒤로는 사치와 향락을 일삼던 위선자인 고기야 무장가(郭佳 穆彰阿)는 극중에서 나오지도 않았다. 거기다가 실제로 도광제의 명으로 황실 은고(銀庫)를 지키는 관원은 장성보(張誠保)로 그의 형 장형지(張亨智)는 아들 장리홍(張利鴻)에게 지주(知州)라는 관직을 사주고 싶어서 동생이 지키는 은고 열쇠를 훔쳐 11월초 11474량의 은자(銀子)을 11개의 포대에 담아 호부(戶部)로 보냈는데 훔쳐낸 은자가 남아서 그걸 마저 집으로 가져오다가 들키는 바람에 분노한 도광제에게 재산이 몰수당하고 일가가 역모에 준하는 혐의로 멸족당하게 된다. 문제는 천일야사에서는 도광제의 눈을 피해 황실 은고에서 은자를 빼내가던 장성보(張誠保)와 그의 형인 장형지(張亨智) 형제는 전혀 다뤄지지 않아서 천일야샤 제작진에 의해 애꿋은 무영전 대학사 조진용(曹振鏞)이 악역으로 연출되었다. 어이없게도 자린고비를 자처한 황제 자신이 사후에 안장될 능묘인 모릉(慕陵) 공사에는 훗날의 [[서태후]]의 정동릉(定東陵)이나 이전 황제 중 최대인 [[건륭제]]의 유릉(裕陵) 공사비보다도 더 많은 240만 냥을 소모했다. 이는 동릉 구역에 처음 지었던 능묘에 물이 새는 하자가 발견되자 그걸 수리해서 재사용하는 대신 아예 서릉 구역에 새로 능묘를 다시 지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 능묘의 위치가 동릉에서 서릉으로 옮겨진 덕분에 뒷날 군벌 [[쑨뎬잉]]이 [[동릉 도굴 사건|동릉 구역의 황릉들을 무차별 도굴할 때]] 무사할 수 있었다.[* 비슷하게 이전에 이곳에 묻혔던 [[옹정제]]와 [[가경제]]의 무덤도 도굴을 피할 수 있었다. 다만 후대인 [[광서제]]의 무덤은 서릉에 있었지만 도굴을 당한 적이 있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검소함의 보람이 있긴 한 셈이다. 대신 도광제가 받았어야 할 횡액은 아들 함풍제에게 넘어갔으니.[* 건륭제 때 [[소목#s-4]]을 적용해서 확립된 청나라 황실의 조장 제도에 따르면 황제가 동릉 구역에 능묘를 마련하면 그의 뒤를 이은 황제는 서릉 구역에 능묘를 마련하는 식으로 동릉과 서릉을 번갈아 사용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건륭제는 동릉의 유릉, 가경제는 서릉의 창릉이었으므로 응당 도광제는 동릉으로 가야 했으나, 서릉의 모릉으로 조장 제도의 방향을 틀어버리자 아들 함풍제는 어쩔 수 없이 동릉의 정릉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아편 중독의 후유증이 엿보이는 초상화를 보면 별로 안 그랬을 것 같지만 지친왕 시절엔 '거동이 멋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도 그럴 것이 도광제는 10대 때부터 할아버지 건륭제 앞에서 팔기식 궁술을 선보이며 사슴을 잡아내는 등 무예가 뛰어났고, 가경제 시절에 자금성으로 반란군이 잠입하자 손수 권총을 들고 이들을 제압했던 경력이 있다. 더불어 이 시기의 도광제는 럭셔리함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아편을 정말 멋들어지게 피웠기에 이를 지켜보던 신하들도, 궁녀들도, 심지어 아버지 가경제도 도광제를 멋쟁이로 보았다. 이 때문에 훗날 사람들에게는 가식적인 위선자로 여겨지기도 한다. 조선에 대해 여러가지로 배려를 한 모양이며, 화이관에 투철했던 조선 왕조에서도 도광제가 붕어했다는 소식에 철종 임금과 대왕대비가 안타까워 했다. [[https://sillok.history.go.kr/id/kya_10102004_002|철종실록]] 조선 사신들도 통치력에 의문을 표한 전임 [[가경제]]와는 다르게 도광제는 호평했다. 재위기간은 조선의 [[순조]](1800년 ~ 1834년), [[헌종(조선)|헌종]](1834년 ~ 1849년)과 겹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