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도광제 (문단 편집) == 즉위 전 == 1782년 9월 16일 가친왕 영염과 효숙예황후 히타라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가친왕이 측복진과의 사이에서 낳은 형이 있기는 했지만 유아기에 요절했기 때문에 사실상 장자 대접을 받았으며, 어린 시절부터 문무를 빠르게 익혀나가며 할아버지 건륭제의 총애를 받았지만 가경제가 황위를 물려받은지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니를 여의고 말았다. 1813년에는 가경제가 열하로 피서를 떠나 있을 때 가경제 재위기 초반 10년간 난리를 피운 백련교와 마찬가지로 건륭-가경 연간의 민란 주동세력 중 하나였던 백련교 분파 천리교의 신자들이 복수를 꿈꾸며 자금성 내로 쳐들어오는 '계유지변'이 벌어졌는데, 민녕은 당황하는 시위와 환관들을 지휘하여 [[건륭제|건륭]] 연간부터 사용이 금기시되었던[* 건륭제는 궁술과 기마가 만주의 정신이랍시고 화약무기의 개량 및 개발을 등한시했다. 물론 건륭제가 바보도 아니고 만주의 정신 운운은 당연히 핑계고 실제로는 무기 강화의 빌미로 중앙 밖의 군사력이 커질 것을 우려해서였다. 결국 [[건륭제]]의 손자, 증손자들이 [[아편전쟁]]에서 호되게 대가를 치렀다. ] [[머스킷]]을 꺼내들어 쏘며 진압했다. 물론 끝난 뒤 내통자들까지 깔끔하게 처벌한 것은 덤.[* 당시 내시들이 총을 장전해주었고 도광제는 사격만 했는데, 내시 중에도 내통자가 있어 총알 없이 화약만 장전된 총을 받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도광제는 수 차례 총을 쐈는데도 적이 죽지 않자 내시 중 내통자가 있음을 알았으나 전투 중인지라 그 자리에서 처벌하지는 않았고, 총알 대신 옷 단추를 뜯어넣어 발사해서 위기를 넘겼다고.] 가경제는 열하에 가 있었기 때문에 별 피해가 없었지만 큰 충격을 받아 스스로 신료와 백성들에게 사죄하는 죄기조를 발표하기도 했으며, 민녕은 이 때 반란군으로부터 황궁을 지킨 공으로 지친왕에 봉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