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도광제 (문단 편집) === 아편 전쟁 === 도광제는 1810년대부터 마구 들어오기 시작하여 당시 청나라의 최대 문제로 대두되었던 중독성 강한 마약인 '''[[아편]]'''과의 정면 승부를 선언했다.[* 서구열강들은 청나라의 은을 빼오기 위해서 일부러 고가의 아편을 팔아 막대한 이익을 챙기고 있었다. 이 때문에 180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청나라는 세계 은의 블랙홀이라고 할 정도로 막대한 은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이후부터는 은의 순유출이 가속화되었다.] 아편은 일찍이 [[옹정제]] 시기부터 청나라에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이때만 해도 1년에 200상자 정도로 수입량이 엄격히 제한되었다. 그러다가 점차 양이 불어나며 [[건륭제]] 시기에는 1천 상자, [[가경제]] 시기에는 4천 상자, 도광제 시기에 이르자 3만 상자에 달했다. 이 때문에 웬만한 고위급 인사들은 모두 아편을 즐겨 피웠고, 사실 황제 자신도 아편을 피웠지만, 워낙 아편의 사회적인 병폐가 심각했기에 [[임칙서]]를 파견하여 외국 상인의 아편까지 몰수해 바다에 버리게 하는 극약처방을 내렸다. 이때 도광제는 황제로서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 황자 시절부터 즐기던 아편을 과감히 끊어버리고[* 이에 대해서는 모범을 보이는 치국의 차원이 아니라 아들을 낳아야 하니 건강관리에 신경쓴 것이라는 삐딱한 시선도 더러 있다. 실제로 이 시기에는 황장자 혁위가 요절한 후 후사가 위태로워져서 황제가 ~~밤일에도 신경쓰고~~ 만수무강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렇게 건강관리를 한 덕에 만 70세까지 장수하여 성년기의 혁저와 혁흔 중 '후사를 고를 수 있는' 여유(?)도 누릴 수는 있었다. ] 못 끊는 황족들을 작위를 박탈한 채 신강으로 유형보내는등 아편 문제에 강경하게 대응했다. 청나라가 자국 상인들의 아편까지 몰수하여 바다에 처넣어 버리자, 서양 상인들은 특히 분노했고 그중에서도 영국이 나서 이를 빌미로 1840년에 전쟁을 선포하였다. 이때문에 일어난 전쟁을 [[제1차 아편전쟁]]이라고 부른다. 다만 이 아편전쟁은 심지어 영국 내부에서도 비난이 많았는데, 따지고 보면 영국의 명분이 타국에 마약을 팔기 위해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이었으니 욕을 먹어도 할 말은 없었다.[* 영국 하원에서 전쟁 찬성이 271표, 반대가 262표가 나왔다. 그만큼 의원들 내부의 의견 차도 심했다는 이야기. 반전파이자 훗날 [[영국 총리]]가 되는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 의원은 "우리 대영제국의 양심이 262명밖에 안 된단 말인가!"라고 한탄했다.] 초기에 청 조정은 단순히 출병한 영국군을 항의사절단 정도로 생각했고, 영국군이 임칙서를 비난하자 임칙서를 파면하는 선에서 이들의 요구를 들어주려 하였다. 허나 임칙서가 쫒겨난 이후에도 영국군이 중국 남동부 해안가를 침공하여 파죽지세로 밀려오자 청나라는 깜짝 놀라 남부의 군대를 끌어모아 겨우겨우 이들을 막으려 들었다. 허나 이미 망해가는 청나라에는 최신무기로 무장한 영국에 맞설 힘 따위는 없었고, 심지어 [[난징]]이 거의 함락되자 전의를 상실하고 1842년에 영국과 [[난징 조약]]을 체결하였다. 청나라는 난징 조약으로 [[홍콩]]을 영국에게 99년간 넘겨주고 배상금을 지불하며 [[푸저우시|복주]] 지방의 항구들을 일부 개항하였다. 이후 [[아편]]의 수입량은 폭증하며 청나라는 갈수록 망해갔고, 영국의 승리 소식을 들은 다른 서구 열강들도 개떼처럼 모여들어 영국과 비슷한 이권을 뜯어가며 청나라는 갈수록 혼란스러워져만 갔다. 당시 청나라의 가장 큰 실패 요인은 서양 문명 및 제국주의를 막아낼 능력이나 세계정세의 이해 부재, 설상가상으로 [[팔기군]]/[[녹영(청나라)|녹영]]이 중심이 된 국방력의 저하 등이었다. 게다가 당시 중국 관료층은 [[산업 혁명]]이나 신기술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고, 지난 2천여 년간의 틀에 갇혀 유연한 사고를 할 기량 따위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아편 전쟁 이후 70여 년간 청나라는 외세의 반식민지 상태에 처했다. 이는 도광제와 임칙서 개인의 능력 문제라기보다는 부패기득권층인 만주 귀족들의 모함과 당쟁, 그리고 막장화한 팔기군과 녹영의 무능이 가장 큰 문제였다. 다만, 도광제 역시 [[아편전쟁]] 초창기에서 군함끌고 온 영국군을 그냥 단순한 '항의사절단'으로 생각하고 결사적으로 싸우기 위해 전력을 다하려던[* 임칙서는 영국군에 대항하여 미국 상인들에게 서양 대포 300문과 군함을 구입했다.] 임칙서를 파면하고 기선을 새 흠차대신에 임명하는 등의 실책을 저지르기도 했다.[* 1992년 영화 '아편전쟁'에 잘 드러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