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도끼 (문단 편집) === 한국 === [[파일:S00000059_I4728701.jpg|width=300]] [[파일:벌목도.jpg]] [[채용신]]의 벌목도. [[파일:AD221001-1.jpg]] 20세기 민화인 고사인물도 중 도2. [youtube(tgx7-Xy6OLA)] [youtube(D5amgRtZG90)] 한국의 전통도끼 생산 과정. '''한국 중세 [[배틀액스]]의 직계후손이다.''' 도끼를 군용으로 쓰지 않은 지 오래인 현대에도 충분히 갑옷을 파괴하고 인마를 살상할 수 있는 엄연한 실전무기다. 무기로 쓰였다고 해서 단순히 낫이나 곡괭이처럼 농기구를 임기응변식으로 쓴 거라 생각할 수도 있으나, 의외로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삼국시대 때까지 올라가는 나름 근본 있는 무기다. [[고구려]]의 도끼보병인 부월수가 유명하며, 그 후신인 [[발해]]에서도 도끼를 전투용으로 많이 사용했다. 한국은 고구려 때부터 [[온돌]] 때문에 --구한말쯤엔 민둥산이 대부분일 정도로-- 다른 나라 문화권에 비해 나무를 베고 장작을 팰 일이 유난히 많았는데, 이 탓에 고대~중세 한국에서 대부분의 평민들이 도끼질 장인이었고, 전쟁에 도끼 들고 나갔을 때도 별 훈련 없이도 적군을 잘만 썰었기 때문(...).[* 비슷한 이유로 [[편곤]]도 사용자가 [[도리깨]]질에 도가 튼 농민들이라 전장에서 흉악한 인마살상의 위력을 발휘했다.] 그뿐만 아니라 한민족이 [[수렵채집인#s-4.1|반농반렵민족]]이었던 것도 무시 못 한다는 의견도 있다. [[시베리아호랑이]], [[우수리불곰]], [[멧돼지]] 등 온갖 정신나간 스펙의 맹수들은 가죽이 워낙 두꺼워서 엥간한 날붙이로는 잘 들지도 않으며 도끼 정도는 돼야 유효타를 먹일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https://youtu.be/_2QJCTf9A68|실제로 온갖 농기구나 오함마로 때려도 멀쩡한]] 멧돼지가 [[https://youtu.be/o1silE-6Y4Y|도끼로 몇 번 내려찍자 황천길로 가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오위진법에서도 상황에 따라 창검류 대용으로 도끼를 쓸 수 있다고 명시된 것을 보면 조선시대에 이른 후에도 널리 통용된 모양이다. [[삼국지연의]] 등에서 이따금 [[자객]]처럼 등장하는 '도부수'(刀斧手)[* 말 그대로 큰 칼이나 도끼를 들고 호위병인 척하고 서 있거나, 정 뭐하면 장막 뒤 같은 데 숨어있다가 지령이 떨어지면 튀어나와서 목표를 베어 죽이는 역할을 맡았다.]는 이러한 도끼(斧)와 큰 칼(刀)을 사용하는 군사들을 가리킨다. [[탄금대 전투]] 당시 [[김여물]]이 죽기 직전에 [[신립]]과 비장한 작별을 하고 대부를 휘두르며 적진에 뛰어들었다는 기록이나, [[인조반정]] 당시 이기축이 [[돈화문]]을 도끼로 파괴했다는 등의 기록을 볼 때 적어도 조선 중기까지는 조선군의 엄연한 주력 무기 중 하나이자 [[맹장]]의 상징이라는 인식이 있었던 듯하다. 심지어 의외로 [[창]]보다도 많이 쓰였다고 하니 말 다한 셈. 하지만 임진왜란 당시부터 이미 도끼가 창에 비해 리치가 너무 짧다는 문제 제기가 있었고[* 사실 이는 조선의 창이 다른 나라 창들에 비해서 짧아서 선호되지 않았던 탓도 있다. 일본에선 길고 튼튼한 목재가 흔했던 반면에 조선에선 이런 좋은 나무를 구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 결국 도끼는 조선 후기엔 조선군에서 완전히 퇴역하고 본업인 농기구로서의 역할만 담당하게 되게 된다. 하지만 근본이 근본이다 보니 형태 면에서 한반도 고대~중세 배틀액스에서 크게 바뀐 점이 없다. [[파일:900w_20170909130647_kfayeeby1.jpg]] 왼쪽이 조선도끼, 오른쪽은 평범한 공장제 도끼. 조선시대 도끼 유물들을 보면 일괄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 있는데, 날이 타 문화권 도끼들에 비해 매우 두꺼우며 도끼뿔[* 도끼머리에서 날의 반대쪽 부분.]이 유난히 발달했다는 점이다. 우선 도끼날의 경우, 타 문화권의 도끼들도 날이 두껍긴 하지만 조선도끼의 경우는 상당히 특이한데, 일반적인 도끼머리의 위쪽 단면을 보면 자루 부분에서 날 쪽으로 갈수록 [[오목렌즈]]처럼 좁아지는 것에 반해, 조선도끼는 자루 부분에서 날 쪽으로 갈수록 [[볼록렌즈]]처럼 볼록하게 좁아지는 게 특징이다. 즉 '''날의 빗면각 자체가 크단 얘기.''' [[파일:65938431013F17D628D00862EE66897A9A13D628625640AD021C2F26F2F01936.jpg|width=300]] [[파일:DDA5E81E85EA929C2BEC6B0AFAD6E7C146374AA704E6768B388AED0851BF5D2C.jpg|width=300]] [[파일:ㄱㄴㄷㄴㄷㄴㄷ.jpg|width=300]] 일반 조선도끼 [[파일:50520-2-7168.jpg|width=300]] [[파일:CqgNOl3LT6WAaIAhAAAAAAAAAAA251.600x447.jpg|width=300]] [[파일:24471-medium-size.jpg|width=300]] 뿔도끼 또한 도끼뿔의 경우, 조선시대의 도끼는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도끼뿔이 벽돌 같이 튀어나온[* 이런 형태의 도끼를 '몰해머(Maul Hammer)'라고 하는데, [[https://www.google.com/search?q=splitting+maul&client=ms-android-samsung-ss&prmd=isvn&sxsrf=APwXEdfTjejFn6r3E9FxDFnoh2fW6YrvaA:1679974308581&source=lnms&tbm=isch&sa=X&ved=2ahUKEwjr6JP_1_39AhUaklYBHebsBcQQ_AUoAXoECAUQAQ|장작을 패는 데 특화된 도끼]]이다. 머리가 워낙 무거워서 양손으로 들고 위에서 아래로만 휘두르게 되어 있는 등 운용법은 도끼보단 오히려 [[오함마]](...)에 가까운 도구이다.] '일반 도끼(이하 '조선도끼'로 통칭)'와 도끼뿔이 [[곡괭이]]같이 생긴 '뿔도끼'로 나뉜다. 상술한 '조선도끼'의 경우 도끼로서의 용도 외에도 도끼를 뒤집어서 [[오함마]]처럼 쓸 수도 있었고[* 실제로 조선도끼 유물 중엔 도끼뿔의 모서리 부분이 (낡은 오함마의 그것처럼) 함몰된 경우가 많이 보인다.] 뿔도끼 역시 뒤집어서 [[곡괭이]]나 [[빠루]]처럼 쓸 수도 있었다. 특히 이 뿔도끼의 경우 활용도가 그야말로 무궁무진했는데, 이 곡괭이 같이 생긴 도끼뿔은 일반 [[곡괭이]]처럼 쓸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빠루]]처럼 사용허서 나무뿌리를 뽑을 수도 있었고[* [[관목]]이 우거진 황무지를 개간할 때 가지와 줄기는 도끼날로 쳐내고, 뿌리는 도끼뿔로 뽑아내는 식으로 운용했다는 기록이 많이 보인다.] 심지어 [[피켈]]처럼 써서 절벽이나 나무를 오를 수도 있었다고 하니[* [[해와 달이 된 오누이]]에서 호랑이가 도끼로 나무를 찍어서 올라갔다는 구절을 읽고 '도끼도 있으면서 나무를 그냥 베어 버리면 될 텐데 왜 굳이 찍어서 올라가는 거야?' 싶었던 사람이 많겠지만, 여기서 말하는 도끼는 뿔도끼를 말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조선시대판 [[멀티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이런 형태는 [[크림 칸국]]의 [[https://www.metmuseum.org/art/collection/search/694438|전투용 도끼]][* 일반 조선도끼와 흡사하다.]나 [[마자르족]]의 도끼인 [[https://www.google.com/search?q=fokos&tbm=isch&ved=2ahUKEwiH1efYj-r_AhWAmVYBHTI_CQ0Q2-cCegQIABAD&oq=fokos&gs_lcp=ChJtb2JpbGUtZ3dzLXdpei1pbWcQAzIECCMQJzIHCAAQExCABDIHCAAQExCABDIHCAAQExCABDIHCAAQExCABDoJCAAQDRATEIAEOgoIABAIEB4QDRATOgoIABAFEB4QDRATOgcIIxDqAhAnOgQIABADOgUIABCABDoICAAQgAQQsQNQ_wdYgyJggydoBXAAeACAAZIBiAHRCJIBAzAuOZgBAKABAbABBcABAQ|포코스]][* 조선 뿔도끼와 흡사하다.]와 매우 흡사한데, [[몽골족]]도 앞서 말한 도끼들과 흡사한 도끼를 썼을 가능성이 크단 걸 감안하면 조선도끼의 이러한 형태는 몽골식 배틀액스의 영향을 받은 것일 가능성이 크다. 즉 조선도끼 역시 기병용 무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영화 [[https://movie.daum.net/moviedb/grade?movieId=139976|시베리아 정복자]][* [[러시아 영화]]인데, 러시아 전쟁영화들은 전체적으로 고증 수준이 매우 높은 편이다.]에서 이러한 '타타르식 기병도끼[* 이 영화의 악역은 [[준가르]]군이다. 사실 여기서 준가르군은 최종보스를 제외하면 대부분 만곡도를 쓰는데, 여기서 묘사된 만곡도 운용법이 조선군의 도끼 운용법과 거의 비슷하다.]' 운용법이 잘 묘사되어 있다. 도끼가 조선의 전장에서 퇴역한 이후 [[편곤]]이 그 빈자리를 채우게 되는데, 실제로 조선도끼와 편곤은 길이나 무게중심 등에선 좀 차이가 나지만 농기구 휘두르듯 썼다는 점이나 말 위에서 (무게를 실어서) 그냥 휙휙 휘두르듯이 쓴다는 점 등에서 유사점이 많다. 힘 좋은 장정의 경우 이걸로 아름드리 나무를 순식간에 찍어 넘길 수가 있었다고 한다. [[호미]], [[조선낫]], [[괭이]]와 함께 일제시대에 일본 농학자들을 오히려 감탄케 했던 조선의 농기구 중 하나. 뿔도끼는 [[산업화]] 시대 이후 [[화전(농업)|화전]]민들이 자취를 감추면서 필요가 없어져 자연스럽게 실전되었고[* 일제시대에 [[조선족|연변으로 넘어간 조선인]]들이 중국으로 가기 전 이 뿔도끼는 반드시 챙겼다고 하는데, 이를 토대로 볼 때 중국에선 보기 힘든 한국 고유의 도끼였을 가능성이 크다.[[http://korean.cri.cn/20191113/ee394276-5931-1ff4-cc0e-8dc5dbbf43e1-i.html|#]]], 현재는 일반 조선도끼만이 생산되고 있는데, 내구도가 뛰어나고 장작을 잘 쪼갠다고 평이 좋다. (넓은 직육면체의 쇳덩이를 두들겨서 만드는) 타 문화권의 도끼와는 달리, 조선도끼는 특이하게 원통형 쇳덩이를 두들겨 펴서 만든다, 이 탓에 상술했듯 날이 매우 두꺼우며 앞쪽 단면이 완전 직사각형이 아닌, 거의 타원형에 가까운 형태를 그린다. [[https://www.koreantk.com/ktkp2014/craft/craft-view.view?craftCd=ktc000806|조선시대 의례용 도끼로 은월부가 있는데]], 금색으로 칠한 것은 금월부, 날이 양쪽으로 달린 것은 은작자/금작자라고 한다. 본래 나무로 만들어 칠을 한 것이지만, 크기를 줄이는 대신 진짜 금속으로 만드는 것도 있었다. 이것은 소(小)자를 붙여 [[https://kyujanggak.snu.ac.kr/dohae/sub/schDetail.jsp?no=D0159&category=E&sWord=도끼|소금월부]]라 하였다. 청나라 때 도끼 유물 중에 [[https://kknews.cc/zh-hk/culture/m3mxonz.html|비슷한 게 있다]]. 조선시대의 [[선비]]들이 [[상소]]를 올릴 때 드물게 사용하던 도구이기도 하다. 지부상소(持斧上疏)라고 하는데, 말 그대로 '도끼를 지닌 채 상소를 올린다.'는 뜻이다. 이는 상소를 받지 않으면 차라리 자신의 목을 찍어 죽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실제로 도끼로 목을 친 적은 거의 없었다[* 이는 신하들이 허구한날 '죽여주시옵소서'를 외쳤다고 진짜 죽인 적은 없었다는 점과 일맥상통한다. 상소를 올리는 본인이 목숨을 걸고 간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의지의 장치이지, 이런다고 진짜 목을 벴다간 왕 본인이 신하의 간언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죽여 없에는 폭군이라고 동네방네 소문내는것과 다를 바 없다.]. 이런 과격한 상소를 올릴 정도라면 적어도 그 본인은 그 문제를 매우 심각하게 여긴다는 뜻이다. 별것도 아닌 일로 이런 극단적인 행동을 했다간 출세에 미친 관심종자로 사대부 사회와 조정에 이름 석 자 단단히 각인시키는 꼴이 되는 것을 잘 알고 있고, 때문에 이러한 행동을 한다는 것은 여러 날 숙고한 뒤에도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결단을 내린 것이 분명하므로, 조정에서도 함부로 무시하기는 어려웠다. 지부상소는 고려시대 우탁께서 최초로 고려 충선왕 때 아버지의 첩을 돌아가신 지 한 달 만에 취하려 드시니 이건 도리에 어긋난다고 해서 이게 성리학자들에게 깊아 각인되어 조선 시대 때 성리학자들이 사용했던 것 같다. 조정의 주요 인사가 이 지부상소를 올리면 말할 것도 없고, 이름 없던 일개 선비가 올린다고 해도 이런 상소가 올라올 정도면 이전부터 이미 상소에서 언급하는 문제로 논란이 커져서 온 나라가 떠들썩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유명한 지부상소로는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기 직전 개화를 반대하며 올린 [[최익현]]의 지부상소가 있다. 다만 역사에 이름을 남긴 지부상소는 대부분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는 양반들이 올렸다. 조헌도 그렇고, 최익현도 일개 시골선비가 아니라 중앙관료 출신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