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도미티아누스 (문단 편집) === [[도미티아누스 암살 사건|암살과 사후]]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 도미티아누스 암살 사건)] 상술했듯 도미티아누스는 자신의 법률상 지위와 위상에 상당히 공을 들였고 본인 스스로를 우상화했다. 그래서 자신이 고대 그리스 경기를 본떠 4년마다 1번씩 개최한 경기를 주재할 때마다 그리스풍의 옷과 금관을 착용했다. 또한 경기시 동료 심판들에게 여러 신들로 둘러싸인 도미티아누스의 초상이 새겨져 있는 관을 쓰게 해 모든 로마 시민들에게 자신이 우월함을 홍보했다. 도미티아누스는 시간이 지날수록 원로원과 관계가 악화됐는데, 이를 본인도 알고 있었다. 동시대 사람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도미티아누스는 암살되기 전 꿈속에서 본인 스스로 수호신으로 섬기고 있던 [[미네르바]]에게서 "내가 [[마르스]]에게 무장해제를 당해 널 도울 수 없다"는 말을 듣고 버림받는 것을 들었다고 한다. 수에토니우스라는 사람이 [[호사가]]이고, 이런 부류의 주장을 사실처럼 적어놓았기 때문에 믿기 어려운 사실이지만 황제 본인은 원로원과 기사계급 인사들과 관계가 최악이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85년 스스로 종신 감찰관에 취임해 고발을 남발하면서 원로원과 제국 내 장군들을 지나치게 통제했다. 늘 개선식 의상으로 원로원에 출입했다. 따라서 도미티아누스는 모든 부분에서 로마 상류층에게 인기가 없었다. 이렇게 원로원을 비롯한 정치적 반대파들과 척을 지고 있으면서, 도미티아누스는 자주 '''주인(도미누스)이자 신(神)인 짐이 하찮은 너희들에게 이렇게 명하노라.'''[* 이 시기만 해도 황제 신격화 및 숭배는 로마 내에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아우구스투스가 기원전 27년 사실상 제정을 열었음에도, 로마 제국은 형식상 엄연한 공화국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미티아누스 이전에 스스로를 유피테르처럼 보이려고 퍼포먼스를 벌이고, 개인신격화 비슷한 우월화 조치를 취한 칼리굴라조차도 본인 스스로를 "주인님(도미누스)" 혹은 그 비슷한 단어로 지칭하지 못했다. 아니 그는 이 단어 비슷한 부류의 것은 원로원과 로마인들 앞에서 입밖에 대놓고 꺼내지 않았다. 이는 도미티아누스 이전과 아우렐리아누스 황제 이전까지의 로마황제들도 비슷해,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원로원에게 신하 노릇이나 하라고 말을 대놓고 하지 않았다. 도리어 2대 황제 티베리우스의 경우, 동방 출신의 원로원 인사가 농담으로 "도미누스(주인님)"이라고 아부하자, 크게 노해 "이 단어는 우리 집안 노예들이 나를 부를 때만 쓰는거다! 다시는 그 단어를 사용하지 마라!"고 경고까지 했다. 즉, 로마 원수정 아래에서 도미누스와 같은 왕정 비슷한 용어는 로마와 본국 이탈리아 밖의 지중해 동부, 그것도 이 일대의 속주민들을 대상으로 장려된 용어 중 가장 과격한 용어였다. 다만, 아우렐리아누스 이후 도미누스는 황제들 입에서 공식화됐고, 디오클레티아누스 이래 공식적으로 정착됐다. 다시 말하면, 도미티아누스가 죽고도 200여 년 뒤 [[도미나투스]](전제정) 체제 성립 이후에서야 로마 황제는 원로원과 로마시민들을 신민으로 취급할 수 있었다.]와 같은 발언들로 반대파들을 자극했다. 따라서 원로원 내에서 도미티아누스에 대한 불만은 상당히 컸고, 실제로 이런 평판은 도미티아누스가 생전 정적들을 고발하고 제거하는 일들과 합쳐져 암살된 뒤 ‘폭군’으로 단죄된 이유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게르마니아 총독이 [[게르만족]] 출신의 점성대가이며 [[예언가]]인 라기니우스 프로클루스를 불경죄 혐의로 체포해 로마로 압송했다. 라기니우스 프로클루스는 게르마니아 지역에서 번개와 별자리로 점을 치다가 도미티아누스가 서기 96년 9월에 제 수명을 못 채우고 죽을 것이라고 예언했기에, 총독이 깜짝 놀라 체포 후 로마로 보냈던 것이다. 도미티아누스도 총독의 보고로 이 점쟁이가 허풍쟁이가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재차 점을 치게 했다고 한다. 이는 수에토니우스 외에도 후대의 디오 카시우스조차 사실이라고 기술했는데, 이 점쟁이가 친 게르만족과 켈트족들이 사용한 점성술과 그리스 및 로마의 점성술 모두에서 똑같은 결과가 나왔다. 그래서 도미티아누스는 이 사람에게 직접 사형을 언도했다. 허나 라기니우스 프로클루스의 점괘에 따르면, 황제의 죽음이 이해 9월 16일이 될 것이라고 했기 때문에 일단 사형 집행은 그가 예언한 날짜 이후로 무기한 중지됐다. 라기니우스 프로클루스가 직접 점괘를 공개하기 전부터, 로마와 황제 주변 상황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따라서 도미티아누스는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암살에 대비했다. 도미티아누스는 호위를 강화하고 자신의 배게 밑에 늘 호신용 검을 두고 잤고, 약간의 변고 조짐이 있으면 즉시 고발을 통해 의심되는 이를 붙잡아 체포하고 심문했다. 그럼에도 결국 96년 9월 18일 저녁, 그는 황궁 안에서 암살됐다. 황제는 시종 스테파누스에게 암살됐는데[* 하인이 도미티아누스한테 공문서가 왔으니 서명해달라고 해서 책상으로 왔는데 이는 계략이었다. 그곳에는 무장한 스테파누스와 하인들이 그를 죽이려고 대기하고 있었다.], 처음 일격을 당할 당시 배게 밑에 숨겨 놓은 검이 없자[* 스테파누스와 공모한 하인 파르테니우스가 사전에 검을 치워버렸다.] 하인들에게 칼을 내놓으라고 소리 지르고 침실을 탈출하려고 했다. 하지만 하인들에 의해 모든 문이 굳게 잠겨 있어 도미티아누스는 탈출하지 못했고 맨손으로, 무장한 스테파누스 및 하인들과 싸워야 했다. 이때 도미티아누스가 얼마나 처절하게 저항했는지 칼에 손이 베인 상황에서 부상당한 손으로 암살자의 얼굴을 붙잡고 눈을 후벼 파려고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스테파누스와 암살자들에게 7번이나 칼에 찔려 다시 한번 치명상을 입고 44세의 나이에 죽었다. 시신은 도미티아누스를 아기 때부터 키워준 유모가 수습해 화장한 뒤 조카딸 율리아의 무덤에 재를 섞는 방법으로 매장되었다. 유모의 이 행동 때문에 후일 도미티아누스가 율리아와 근친상간을 저지른 것을 황후 [[도미티아 롱기나]]가 알게 되어 암살에 가담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하지만 반대 의견도 많다, 도미티아가 이후 재혼하지 않고 남은 평생을 '나는 도미티아누스의 아내'라고 말하며 수절하는 등 부부 사이가 좋았다는 증거도 많았기 때문이다. 이 암살극의 이면에는 근위대장 2명과 여러 궁정 관리, (위에 나온 것처럼 반론도 있지만) 황후 [[도미티아 롱기나]]가 있었으며,[* 이들의 철저한 사전모의 속에서 암살이 이뤄졌기 때문에 암살자들이 황제의 침실을 습격했던 날, 도마티아누스는 무방비 상태로 암살됐다.] 도미티아누스의 뒤를 이어 제위를 이은 [[네르바]] 역시 음모에 가담한 것이 분명하다고 한다. 하지만 존 그레인저로 대표되는 현대 사가들은 시종 스테파누스가 암살을 결행한 배경에, 도미티아누스가 벌인 서기 95년 부유한 자유민 에파프로티투스([[네로]]의 해방노예이자 개인비서) 숙청 사건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한다. 에파프로티투스는 제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 1세]]에게서 자유를 얻고 황제의 개인이름+성씨를 받아 자유를 얻은 사람이다. 그는 [[클리엔텔라]] 의무 조항 때문에 제 주인의 아들인 브리타니쿠스를 죽인 네로의 개인비서 역할을 했지만, 네로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해 국가의 적이 된 이후 홀로 된 네로를 끝까지 따르고 주인의 마지막 명령("내 목을 찔러라")를 이행한 사람이었다. 헌데 그는 도미티아누스에게 네로가 몰락한 지 한참이나 흐른 뒤에야, 도미티아누스의 명령으로 기소돼 추방되고, 처형됐다. 이는 에파프로티투스가 과거 피소 음모 사건 당시 네로 황제에게 보고서를 작성해 보고했고 네로의 황금궁전 프로젝트를 사실상 총지휘한 실세 중 실세였기에, 어떻게 보면 로마인들 생각에는 죗값을 치룬 일이었다.[* 왜냐하면 에파프로티투스가 모은 막대한 재산은 피소 음모 사건 보고서를 통해, 그 공로로 얻은 피해자들의 재산 중 그 일부였기 때문이다.] 허나 스테파누스 등 플라비우스 왕조의 노예, 해방노예들이 봤을 때 이는 당시 원로원을 모두 적으로 둔 황제가 괜한 꼬투리를 잡아 처형한 사건으로, 언젠가는 자신들도 황제에게 당할 것을 보여준 상징 같은 사건이었다. 실제로 에파프로티투스가 추방되고 처형된 명분은 그와는 무관한, 도미티아누스 시대에 벌어진 법원 관리 암살 사건이었다고 한다. 어쨌든, 스테파누스는 동료 해방노예 막시무스와 함께 황제를 암살했고, 황제는 라기니우스 프로클루스의 점괘 그대로 그날 어이없게 생을 마감했다. 도미티아누스가 죽자, 원로원은 그의 죽음을 기뻐하며 도미티아누스에게 "[[기록말살형]]"을 선고했다.[* 로마 상류층 남녀 모두에게 가장 불명예스런 형벌로, 고인이 생전에 이룩한 모든 업적에 대한 기록을 지워버리는 것이다. 사실 이 벌은 원로원의 화풀이에 가까운 것으로, 네로도 이 벌을 받았으며 말년에 원로원과 사이가 나빠진 하드리아누스도 사후 다음 황제였던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눈물을 흘리며 원로원을 설득하지 않았으면 이 벌을 받을 뻔했다. 의외일 순 있는데, 칼리굴라는 이 벌을 받지 않았다. 사실 칼리굴라가 이 벌을 받지 않은 것은 암살 직후 워낙 상황도 급박했고, 애당초 이 황제의 암살은 원로원 안에서도 암살 당일부터 "공화정 복귀vs아우구스투스 이후 공화정 체제 유지"라는 구도에서 후자가 절대 지지를 받아, 일찌감치 암살가담자들이 반역자로 몰린 "멀쩡한 상황에서 벌어진 황제의 억울한 죽음"과 가까운 사건이었기 때문에 이 처벌을 받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다. 이는 요세푸스, 타키투스, 소 플리니우스, 디오 카시우스 모두 증언한 사실이므로, 칼리굴라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의외일 수 있다.(로마인들 입장에선 기록말살형 건덕지가 없는 국가원수 시해사건이었다.) 물론 공화정 회귀를 주장한 원로원 내 소수세력은 칼리굴라를 진심으로 기록말살형을 시키고 싶어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당시, 칼리굴라 외에도 선대의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도 공화정 체제의 적으로 간주해 기록말살형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살아남은 아우구스투스 직계 남녀황족을 모두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황숙 클라우디우스는 살아남았고, 그는 근위대의 지지를 업고 완전무장한 병사를 대동해 원로원에 출석했다. 이때 그는 중구난방으로 싸우는 원로원 앞에서 기록말살형을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즉, 칼리굴라 암살은 암살결행 목적부터 원로원 내 분위기까지 기록말살형 선고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배경 때문에 새 황제와 원로원 모두 이 사건을 정리한 뒤, 관련 가담자를 처리하고 서둘러 이 문제를 덮고 넘어갔다.(그럼에도 암살이 벌어진 직후, 원로원 의원 중 황제 지지세력과 황실이 고용한 게르만인 경호대, 근위대 병사들은 암살에 가담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들을 잡아 죽이고 그 가족들까지 "황제를 위한 복수"를 명분삼아 도륙냈다.)][* 네로, [[엘라가발루스]]의 경우에는 기록말살형이 통과되지 않았음에도 사실상 기록말살형이 그대로 집행되어 단죄받았다.] 다만 도미티아누스가 완성한 플라비우스 경기장을 만든 사람이 도미티아누스라고 쓰여진 석판만큼은 경기장을 지은 것을 감사히 생각한 시민들이 결사적으로 막아서 지우지 못했다. 시민들은 무관심했다고 해도, 군대는 이에 반발해 이듬해에 네르바에게 책임자들을 처벌하라고 협박했고 스테파누스, 파르테니우스 등 암살자들을 끌어내 처형했다.[* 도미티아누스는 군대에서 인기가 매우 높았다. 이유는 도미티아누스가 카이사르 이후 처음 군인들의 급여를 올려주었기 때문이다.] 그 외에 공화정으로 복귀하려는 시도도 있었으나, 이는 칼리굴라 암살 때와 마찬가지로 금세 사그라들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그들의 주장이 소수 중 소수 주장인데다, 머리 끝까지 열받은 군대가 제정이 공화정보다 낫다며 무산시켰기 때문이다. 어쨌든 원로원은 네르바를 황제로 추대함으로써 플라비우스 왕조는 27년 만에 붕괴되고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가 그 뒤를 이었다. 도미티아누스가 죽자, 원로원과 근위대는 놀라운 점괘로 미래를 예언한 라기니우스 프로클루스에게 감탄하며 그를 풀어줬다. 이는 네르바 황제도 비슷해, 네르바는 어떻게 보면 도미티아누스를 걱정해 그 운명을 예언해준 라기니우스 프로클루스에게 400,000[[세스테르티우스]]라는 거금을 내려줬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