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도자기 (문단 편집) === 백자의 등장 === [[파일:external/upfile.haotianjin.net/201341710162417062531.jpg]] 아시아 예술품 최고가인 396억 원에 낙찰된 원나라 시기 [[청화백자]] '귀곡하산(鬼谷下山)' 그런데 [[원나라]]가 세계를 제패하면서 유행에 변화가 온다. 원은 세계제국으로 원 황제의 통행증만 보유하면 [[콘스탄티노플]]에서 [[베이징]]까지 안전하게 교역할 수 있는 시대였다.[* 어디까지나 '''형식상''' 그랬다는 말이다. [[원나라]]의 지방 행정 제도는 그냥 [[봉건제]]수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으므로 실제로 유럽과 교역을 원하는 상인들은 원나라의 중앙조정의 허가 밑 '''교역로에 있는 지방의 원나라 왕족 및 지방 관료'''들에게도 허가를 받아야 했으며 당연히 [[뇌물]]이 빠질 수 없었다. 게다가 [[몽골제국]]의 교역로 자체도 안전하다고 말하기가 어려운 것이 [[쿠빌라이 칸]]이 원나라를 세우기 시작하면서 분열된 몽골제국은 원나라와 각 칸국 간의 직접적인 전쟁이 없었을 뿐 사이가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그래도 완전히 서로 다른 나라들을 통과하던 과거보다는 동서양 교역로가 일원적으로 묶였고, 과거보다 상대적으로는 원활해졌다.] 참고로 중국과 마주보는 [[황해]] 연안의 상업도시에는 상인 출신 [[이슬람]]인들이 오늘날의 시장으로 임명된 사례가 비일비재할 정도었다. 전통적으로 [[우유]]와 양모를 귀하게 여기는 [[몽고]]족은 백색을 좋아했다. 게다가 원의 수도가 북방에 있는 관계로 북방식 백자가 우세해졌고, 이 즈음에 중국에서는 하얗게 구워지는 백토와 기포를 줄여 소성 시 투명하게 되는 유약이 나옴으로써 오늘날까지 사용하는 백자기술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원황제가 황제의 그릇은 청자가 아닌 백자로 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유행은 완전히 뒤집어졌다. 이슬람 이전의 [[아랍인]], [[페르시아인]]들은 중세 유럽의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전통적으로 은그릇을 선호했다. 하지만 [[무함마드]]가 '''무슬림 사이에서 누구는 나무그릇으로 밥을 먹고 누구는 금그릇, 은그릇으로 밥을 먹는다. 이건 계급불화를 조장한다'''며 금그릇, 은그릇의 사용을 금지시켜버린다. [[우마이야 왕조]]와 [[아바스 왕조]] 초기에는 로마의 영향을 받아 은그릇의 대체재로 유리그릇을 사용하거나, 러스터웨어(Lustreware)라고 도기 위에 금, 은가루를 입히는 기법으로 만든 도기를 사용했지만 러스터웨어는 내구성이 영 병맛이었기 때문에 성이 차질 않았다.[* 러스터웨어의 근본적인 문제는 도자기 태토와 유약의 성분이 근본적으로 다른 데다 융합이 이루어지지 않아 강도면에서도 단단하지 않고, 또 태토와 유약표면이 밀착되지 않아 손쉽게 박리가 일어난다는 점이었다. 요즘도 싸구려 그릇들은 서로 부딪치다가 이가 나가고 그러는데, 러스터웨어는 훨씬 더 쉽게 이가 나가고, 또 이가 나가면 흙으로 된 태토가 드러나서 보기도 흉하고, 그쪽으로 물이 들어가 근본적으로 도자기의 수명을 깎아버리는 문제가 있다. 현재도 옛 안달루스 문화의 흔적이 남아있는 [[스페인]] [[그라나다(스페인)|그라나다]] 일대에서 러스터웨어를 제작하는 공방들이 남아있지만 실사용목적이라기보단 장식용에 가깝다.] 이때 중국으로 간 이슬람 상인들이 찾아낸 대체재가 바로 도자기였으며, 당송시대부터 이미 이슬람인들은 중국에서부터 도자기를 수입했다. 하지만 도자기를 철에 비해 밝고 흰 빛이 나는 은그릇의 대체물로 수입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슬람인들은 대체로 송나라의 주력 수출품인 청자보다도 아직 기법이 미완성되어 푸르스름한 빛이 남아있는 백자를 더 선호했다. 이 백자가 원대에 들어 흙 속의 철분을 완전히 제거하는 기법이 개발되어 새하얀 백자를 생산할 수 있게 되자 대박이 터졌다. 서구의 국가들도 [[기독교]]적 교리 때문에 백색을 숭상하는 편이었다. 따라서 국제무역에서도 백자의 단연 우세였다. 물론 현대의 도자기 유행도 백색이 우세하다. 레스토랑에서 파란색 식기가 나오는 일이 없음을 보아도 알 수 있을 것. 일반적으로 백색은 사람의 심리를 안정시킨다. 여기에 이슬람권으로 부터 전해진 코발트 염료(회청)를 사용한 청화기법이 등장함에 따라 흰 바탕에 다양한 문양과 그림을 그리는 [[청화백자]]가 등장하였고, 하얀 바탕에 검푸른색이 조화된 특유의 아름다움은 동서양 모든 문명권에서 황금이나 보석 못지않은 보물로 각광받게 된다. 이후 청화백자는 2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베스트셀러로 자리잡았고 '''원-명대에 꽃을 피운 중국의 청화백자는 그 기술적 경지는 물론이거니와 미적으로도 초월적 수준으로 평가받아 전 세계를 제패하였다.''' 한편 이슬람권에서는 자체적으로 도자기를 생산하려는 시도도 자주 해왔으나, 13세기 이후 지금의 튀르키예에서 치니(Çini)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했을뿐이며 그나마도 중국 도자기의 내구성과 심미적 아름다움을 충족시키지는 못했다. 당시에는 여러 대체품이 나오기도 했는데 원래 이슬람권에서 잘 하던 금속세공기술로 구리그릇을 만들고 그 위에 에나멜로 색을 칠한 다음 유약을 입히고 가마에서 구워내서 도자기 느낌을 낸 제품들이 있었다. [[페르시아어]]로 미너커리(Minâ kâri)라고 부르는데 오늘날 [[이스파한]]의 특산품이다. [[파일:external/www.k-heritage.tv/1123_do07.jpg]] 원나라 시절, [[고려]]에 북방식 가마기법이 본격적으로 소개되어 고려의 도자기 기술도 크게 진보했지만, 14세기에 나라가 혼란해지면서 [[분청사기]] 형태를 한 청자만 제작되었다. 고려 말기는 한반도 역사에서도 보기 드문 막장 시절이라 (주요 도자기 산지였던) 남해안이 [[왜구]]들에게 초토화되었고, 질 좋은 고령토도 얻을 수가 없었다. 결국 기술적으로 완성된 백자는 15세기 [[조선]]시대가 되어서야 나왔다. 도자기를 만들고 연구하는 [[사옹원]]의 총책임자는 왕자들이 주로 임명되었다. 백자 개발에 얼마나 신경 썼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게다가 청화백자의 재료인 [[토청]]을 구하려고 왕실도 많이 노력했다.[* 문제는 그렇게 구한 토청의 색이 회회청보다 다소 어둡게 나왔다는 점이다.] 그 후 조선의 도자기 기술은 급발전하여 18세기까지 절정을 이루나, 18세기부터 양반 사대부의 취향이 [[놋그릇]] 쪽으로 바뀌고 19세기 [[세도정치]] 시기가 닥쳐오자 정체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