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독도의용수비대 (문단 편집) == 고난 == 일본과의 교전 중에선 사상자가 없었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전달한 위문품을 받는 과정에서 위문단 한 사람이 놓고 온 카메라집을 가져다 주던 중에 허학도 대원이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다. 허 대원은 경찰을 지망하고 있었는데, 사망 후 그의 귀신을 봤다는 대원들이 나타나자 경찰 [[정모(의복)|정모]]와 [[근무복]]을 구해와 그의 위령제를 지내주고 나서야 목격담이 사라졌다고 한다. 독도에 수비대원들이 지낼 막사와 계단 등을 만드느라 허위로 [[징용]]영장을 만들어 울릉도의 목수와 기술자들을 불법으로 징용하여 수비대 기지를 만들었는데 이 과정에서 기술자 몇명이 사고로 목숨을 잃기도 했다. 또 군자금의 부족이 심각하여 제주도 해녀들을 불러 해물을 채취하여 팔아서 군자금을 마련하려 했지만 인건비도 나오지 않을 정도라서 그만두어야 했다. 이들은 1969년과 1972년 독도개발 계획서를 경상북도에 제출하며 실효적 지배 강화를 거듭 촉구했지만, 당시 정부는 이들의 존재가 일본과의 관계 악화로 이어질 것으로 여기며 부담스러운 반응을 나타냈다. 결국 홍순칠 대장은 1974년 12월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사흘 동안 고문을 당했다. 중정의 요구는 더 이상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떠들지 말라’는 것이었다. 다시는 글을 쓰지 못하도록 그의 오른손을 부러뜨리기도 했다고 부인 박영희 여사가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80728023001|전했다.]] 그가 고초를 겪었음에도 언론은 정권의 통제로 보도하지 못했고, 훗날 '국가정보원 진실규명을 위한 발전위원회'나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도 거론되지 않았다. 또한 신군부는 1980년대 초 그가 독도 지킴이로 북한 방송에 소개되자, 그를 즉각 체포해 극렬한 고문을 가하여 간첩 조작을 하려 했다. 결국 고문 후유증으로 홍 대장은 1985년에 서울로 이주했고, 1986년, 폐암으로 숨졌다. 박정희 때처럼 일본 등 외국 차관에 의존했던 전두환 정권은 독도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민간인 출입을 막았고, 심지어 노래 ‘[[독도는 우리땅]]’을 방송 금지곡으로 지정하기까지 했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47295.html|2012년 한겨레 칼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