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독일/역사 (문단 편집) === [[종교개혁]]과 교파 시대(1517~1618)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종교개혁)] [[1517년]] 기존 교회의 타락을 비판한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 발표와 함께 시작된 [[종교개혁]]은 근대 초기 독일사의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였다. 종교개혁의 확산에는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에 의한 금속 활자 및 인쇄기 발명이 촉진한 '매체 혁명'의 영향이 지대했다. 루터는 성경의 가르침 그 자체에 충실할 것을 요구하면서 라틴어로만 읽을 수 있었던 성경을 구어체 독일어로 번역하였는데, 이 '루터 성경'이 인쇄술의 발전에 힘입어 대중들에게 널리 전파된 것이 종교개혁이 성공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종교개혁의 근원지이자 가톨릭 세계를 보호하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지배하에 놓인 독일은 구교와 신교 간 갈등이 매우 격렬하게 분출되었다. [[1519년]] 막시밀리안 1세의 사망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선출된 [[카를 5세]]는 매우 독실한 가톨릭교도로 유럽 내에서 종교개혁의 확산을 막고자 하였으나, 결국 독일에서는 [[토마스 뮌처]]가 이끄는 [[독일 농민전쟁]]과 구교 제후 및 신교 제후 간의 전쟁인 [[슈말칼덴 전쟁]]과 같은 일련의 전쟁들이 벌어졌다. 카를 5세는 막시밀리안 1세에게 상속받은 영지를 바탕으로 세계 제국을 이룩하였으나, 독일에서는 종교개혁 이후 그 권위가 지속적으로 추락하였다. 결국 [[1555년]] 카를 5세의 동생인 [[페르디난트 1세]]의 주도하에 [[아우크스부르크 화의]]가 체결되었다.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통해 루터파가 공인되었고, 군주가 자기 영토의 종교를 결정한다는 Cuius regio, eius religio의 원칙이 관철되었다. 하지만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는 칼뱅파를 배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문제의 불씨를 안고 있었다.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의 각 영방 국가에서는 가톨릭, 루터파, 칼뱅파의 3대 교파 교회가 세속 권력과 결합하기 시작했다. 신교 제후들은 교황 및 교회 조직 자체를 공격한 루터의 교리를 바탕으로 교회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할 수 있었고, 가톨릭교회는 신교 교회와 경쟁하기 위해서는 제후들의 지원이 필수적이었기에 가톨릭 영방에서도 교회에 대한 군주의 지배권을 강화되었다. 그러면서 각 영방은 각 교파의 교리에 기초하여 영토 내 질서를 유지하고 신민의 일상생활을 규제하는 '''사회적 규율화(Sozialdisziplinierung)'''를 강화하고자 했는데, 이를 '''교파화(Konfessionalisierung)'''라고 한다.[* 이러한 사회적 규율화 및 교파화 개념은 근대 국가 형성 과정에서 사회적, 종교적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이후 [[1618년]] [[30년 전쟁]]이 발발하기 까지 독일을 '교파 시대(Konfessionelle Zeit)'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편으로 가톨릭은 유럽 차원의 종교개혁에 대항하여 [[트리엔트 공의회]]를 개최하여 [[가톨릭 종교개혁]]을 실시하였다. 가톨릭 종교개혁은 한때 '반종교개혁(Gegenreformation)'이라고 불렸고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에서 30년 전쟁 발발 이전까지의 시기를 '반종교개혁 시대'라고 부르기도 하였는데, [[레오폴트 폰 랑케]]로 부터 기원하는 이러한 관점은 지나치게 신교 중심적이라는 비판을 받아 현재는 교파 시대 개념으로 대체되었다. 교파 시대 초기의 황제 [[막시밀리안 2세]]의 종교 정책은 비교적 관대하였다. 하지만 막시밀리안 2세의 아들 [[루돌프 2세]]는 [[보헤미아 왕국]]의 수도 [[프라하]]에 있는 자신의 거주지에서 점점 현실을 외면하면서 신비주의에 심취하였고, 루돌프 2세의 긴 치세 동안 구교와 신교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결국 [[1608년]] [[팔츠 선제후국|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의 주도하에 [[작센 선제후국]],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과 같은 신교도 세속 제후들은 '''프로테스탄트 연합'''(Protestantische Union)을 결성하였고, 이에 대항하여 [[1609년]]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1세(바이에른)|막시밀리안 공작]]의 주도하에 [[마인츠]], [[트리어(독일)|트리어]], [[쾰른]]과 같은 성직 선제후들은 '''가톨릭 리그'''(Katholische Liga)를 결성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