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독일/역사 (문단 편집) === [[1848 혁명]]([[3월 혁명]])(1848~1849) === 1840년대의 전 유럽적인 사회 경제적 위기 속에서 발발한 [[1848년]] 프랑스의 [[2월 혁명]]은 전 유럽으로 확산되었다. 독일 연방에서는 먼저 빈에서 혁명이 일어나 3월 13일 메테르니히가 사임하였다. 베를린에서도 혁명이 일어나 군대와 시위대 간의 시가전이 벌어졌고,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시위대에 굴복하였다. 1848년의 혁명적 움직임은 이윽고 독일을 넘어 전 유럽으로 확산되었다. 이윽고 3월 31일 독일 전역에서 온 자유주의자와 민주주의자 500명이 프랑크푸르트에서 예비 의회를 구성하였고, 곧 독일 전체 의회인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Frankfurter Nationalversammlung)가 선출되었다. 국민의회는 통합된 독일 연방국가를 위한 헌법 초안을 작성하였고, 이미 1848년 6월에 임시 중앙 기관인 임시 정부가 설립되었다. 국민의회는 또한 제국법을 제정하고 최초의 통일 독일 함대를 건설하고자 했다. 통일된 독일 연방국가는 원래 독일 연방의 영토에 동프로이센과 슐레스비히까지 포함될 예정이었다. 여기에는 오스트리아의 많은 부분이 연방 영토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대독일주의적 통일을 의미하고 있었다. 자유주의자들에게 널리 환영받은 이러한 통일 방안은 1848년 가을부터 군주국들이 점차 권력을 회복하기 시작하면서 불투명해지기 시작했고, 1849년 3월에 이르러 오스트리아가 통일된 독일 연방국가에 가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프로이센 중심의 소독일주의 해법이 대안으로 여겨지기 시작했고, 1849년 4월 3일 국민의회는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를 독일 황제로 선출하였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이 왕관을 '돼지의 왕관'이라 부르며 거부하였고, 다른 제후들과 마찬가지로 프로이센 국민의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 의원 자격을 불법화했다.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 의원 중 일부는 저항을 계속하였으나 입헌 운동과 관련된 드레스덴, 라인팔츠, 바덴에서의 5월 봉기는 진압되었다. 마지막 혁명가들은 7월 23일 라슈타트 요새에서 항복했다. 결과적으로 독일의 1848/49년 혁명은 실패로 끝났으나 이는 이후의 독일사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 각국에서는 1848/49년의 실패한 혁명을 수용하기 위한 양보가 이루어졌다. 프로이센을 포함한 모든 가맹국에서는 헌법이 선포되었고, 혁명 이후 수립된 반동 체제 역시 1848년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저항에 직면하였다. 1849년 3월 28일에 잠시 발효된 파울교회 헌법은 1919년 [[바이마르 헌법]]과 1949년 [[독일연방공화국 기본법]]에 영향을 미쳤다. 혁명 이후 프로이센에서는 3계급 선거제(Dreiklassenwahlrecht)라는 재산에 근거한 불평등한 차등 선거제가 도입되었는데, 이는 이후 독일 제국 시기에 정치적으로 핵심 문제로 부상하였다. 한편 1848/49년 독일 혁명의 실패 및 독일 자유주의의 패배가 군국주의와 나치즘이라는 파국으로 대표되는 독일의 부정적인 '''특수한 길'''(Sonderweg)로 이어졌는지는 이후 역사가들에게 큰 논쟁거리가 되었다. 원래 존더베크 개념은 19세기 독일 역사가들에게 강력한 독일 제국을 예찬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던 개념이었다. 하지만 나치 독재와 2차 세계 대전 이후 1960~1970년대 서독의 한스 울리히 벨러와 같은 비판적인 '사회사' 역사가들은 이를 부정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즉 나치 독재와 같은 독일사의 파국은 1848년 혁명의 실패에서 기원하는 것이며, 이는 영국과 프랑스와 달리 부르주아 혁명을 겪지 않은 독일만의 부정적인 '존더베크'의 출현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이러한 주장의 핵심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존더베크 개념은 1980년대 이후 독일 국내에서는 [[토마스 니퍼다이]]에 의해, 국외에서는 제프 일리와 데이비드 블랙번으로 대표되는 영국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의 비판에 처하면서 근본적인 재검토에 직면하였고, 현재 역사학계에서는 독일만의 고유한 특수성을 강조하기 보다는 각국마다의 특수성과 유럽사, 세계사적 보편성을 교차하며 독일사를 서술하고자 노력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