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독일/역사 (문단 편집) === 빌헬름 시대(1890~1914) === [[1888년]] [[빌헬름 1세]]가 90세의 나이로 사망한 후 황태자였던 [[프리드리히 3세(독일 제국)|프리드리히]]가 즉위하였다. 자유주의적 정치 사상에 가까웠던 [[프리드리히 3세(독일 제국)|프리드리히 3세]]는 제위에 오른지 99일만에 [[후두암]]으로 사망하였고, 그 해에 프리드리히 3세의 아들 [[빌헬름 2세]]가 29세의 젊은 나이로 제위에 오른다. 그래서 독일사에서는 1888년을 '''세 황제의 해'''(Dreikaiserjahr)라고 부르기도 한다. 즉위 초의 빌헬름 2세는 공개적으로 '''개인 통치'''(Persönliche Regimemt)를 주장하며 노동자들과 사회주의에 대해 온정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었고, 결국 사회주의자법에 대한 황제와 비스마르크 간의 의견 대립은 [[1890년]] 비스마르크의 해임으로 이어졌다. 이후 [[레오 폰 카프리비]](1890-1894), [[클로트비히 추 호엔로헤실링스퓌르스트]](1894-1900), [[베른하르트 폰 뷜로]](1900-1909), [[테오발트 폰 베트만홀베크]](1909-1917)의 네 수상이 이어서 집권한 빌헬름 2세의 친정 시대인 '빌헬름 시대(Wilhelminische Zeit)'가 개막하였다. 비스마르크의 퇴임 이후 빌헬름 2세와 카프리비 내각은 '''신노선'''(Neuer Kurs)을 외치며 비스마르크 시대 말기 격화되었던 사회 갈등을 완화하고자 하였다. 그러면서 농업관세 인하, 사회주의자법 폐지 및 사회 정책 강화, 세제개혁 및 군대예산법 개혁과 같은 정치, 사회적으로 광범위한 진보적인 개혁을 시도하였다. 여기에 카프리비 내각은 프로이센의 3계급 선거제 개혁과 같은 급진적인 개혁까지 시도하였는데, 이러한 정책은 보수당의 반발에 부딪혔다. 이에 카프리비는 중앙당의 지원을 얻고자 가톨릭 학교에 지원금을 주는 교육법을 제정하려 하였으나, 이는 자유주의 세력의 반발까지 불러와 카프리비 내각은 점차 정치적으로 고립되었다. 결국 카프리비는 황제의 신임을 잃게 되었고 [[1894년]] 사퇴하였다. 카프리비의 사퇴와 함께 신노선 정책은 중단되었고, 빌헬름 2세 역시 사회민주당의 약진에 크게 놀라 사회민주당에 대해서도 점차 적대적으로 변하였다. 카프리비의 후임이었던 바이에른 출신의 호엔로헤는 자유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기에 빌헬름 2세의 개인 통치에서 배제되었고, 이 시기의 정치는 점차 필리프 추 오일렌부르크 후작과 외무장관 [[베른하르트 폰 뷜로]]와 같은 총신들이 중심으로 떠올랐다. 또한 점차 권위주의적 성향을 내보이던 빌헬름 2세는 사회민주당을 겨냥하여 전복법안(Umsturzvorlage, 1894), 투옥법안(Zuchthausvorlage, 1899)와 같은 일련의 반동적인 법안들을 입법하고자 하였는데, 이는 자유주의자들과 중앙당, 사회민주당의 반대에 부딪혀 통과에 실패하였다. 이러한 반동 정책들의 좌절은 독일 제국 정치에서 제국의회의 역할이 핵심적으로 부상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사례였다. [[1900년]] 호엔로헤의 사임 이후 빌헬름 2세의 총신이었던 뷜로가 총리직에 올랐다. 뷜로 내각은 보수당과 민족자유당을 중심 지지층으로 삼으면서도, 중앙당을 회유하고 사회민주당의 수정주의 논쟁을 유발하여 분열을 유도하는 등 지지 세력을 통합하는 '''결집정책'''(Sammlungspolitik)을 추진하였다. 이 결집정책의 핵심 수단이 [[세계 정책]]으로 대표되는 제국주의 및 건함 정책이었고, 뷜로 내각은 이를 통해 급성장하는 사회민주당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이는 [[1907년]] 제국의 식민지 [[나미비아]]에서 벌어진 [[헤레로족]] 학살 사건을 두고 벌어진 제국의회 선거[* 호텐토트 선거(Hottentotenwahl)이라고도 불린다.]에서 잘 드러났는데, 뷜로 정권은 제국주의 정책을 비판하는 중앙당과 사회민주당에 대항하여 보수당, 민족자유당, 좌파 자유주의 정당을 규합한 뷜로 블록(Bülow-Block)을 구성하였고 이러한 선거 동맹을 바탕으로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뷜로 내각 후기에 이르러 빌헬름 체제는 통치자인 빌헬름 2세의 과시적이고 경솔한 태도와 맞물려 대내외적으로 위기에 봉착하였다. 우선 대내적으로 [[1907년]]에서 [[1909년]] 사이 빌헬름 체제는 [[오일렌부르크 스캔들]]과 데일리 텔레그래프 사건[* 빌헬름 2세가 영국 언론인 데일리 텔레그래프와의 인터뷰에서 영국인들의 국민 감정을 자극하여 외교 문제로 비화한 사건.]과 같은 정치적 스캔들에 휘말리면서 위신이 실추되었고, 빌헬름 2세의 통치력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국제적으로도 세계정책 및 건함 건설 정책으로 대표되는 팽창 정책은 [[영국]]과의 대립을 격화시켰으며, [[모로코 위기]]와 같은 대외적 위기를 겪으며 독일은 외교적으로 점차 고립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빌헬름 2세 정부의 권위에 큰 타격을 입혔다. 결국 이러한 위기 속에서 수상 뷜로는 점차 황제의 신임을 잃어 갔다. 결국 [[1909년]] 세계정책으로 인한 무리한 지출이 초래한 재정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제출하였던 직접세, 소비세, 상속세 인상 등을 포함한 재정 개혁 법안이 보수당과 중앙당의 반대로 부결되면서, 뷜로는 사퇴하였다. 뷜로의 후임자인 베트만홀베크는 당시 거세게 제기되고 있던 정치 개혁 요구에 대응하여 온건한 입장에서 개혁을 시도하면서 또한 영국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1912년]] 총선에서 사회민주당이 원내 1당으로 떠오르고 [[1913년]]에는 차베른 사건으로 인해 제국 역사 상 최초로 수상의 불신임안이 통과되는 등 베트만홀베크 내각 역시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일 제국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갔다. 빌헬름 시대의 외교정책은 180도 전환했다고 봐도 손색이 없다. 그는 독일과 대대로 앙숙 관계에 있던 프랑스와는 변함없이 적대적으로 대했지만, 러시아와는 비스마르크 시대에 맺은 "독일-러시아 재보장 조약"을 연장하지 않고 폐기했다. 독일-러시아 재보장 조약은 독일과 러시아 중 어느 한 국가가 제3의 국가와 전쟁할 경우 다른 국가는 중립을 지킨다는 내용으로, 1887년 6월 18일에 체결한 비밀 조약이었다. 한편 빌헬름 2세는 영국과 혈연으로 이어진 믿음을 저버렸다. 예를 들어, 1899년부터 1902년까지 영국이 치른 이른바 보어전쟁에서 빌헬름 2세는 보어인을 지지하는 한편, 함선 및 잠수함 제조에 광적으로 잡착하여 영국인의 민감한 신경을 자극했다. 이러한 빌헬름 2세의 정책은 주변국들로하여금 모두 독일에 등을 돌리게 했다. 빌헬름 시대의 외교정책의 또 다른 의미는 바로 비스마르크가 추진했던 평화적 노선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이 시점부터 독일 제2제국 또한 식민지 팽창에 나서게 된다. 빌헬름 2세는 1899년 중국의 자오자우만으로 군대를 파병해서 99년 동안 조차하는 권한을 누리고자 했으며, 따라사 청나라 말기 일어난 의화단 진압 운동에 적극성을 보였다. 1905년에는 모로코를 욕심내던 프랑스에 전쟁 가능성을 들먹이며 위협했으며,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07년에는 독일의 아프리카 식민지인 나미비아에서 학살을 벌이기 까지 했다. 이러한 빌헬름 2세의 식민지 팽창은 결과적으로 영국이나 프랑스와 같은 서구 제국주의 열강과의 충돌을 자극하는 또 하나의 이유로 작용했다. 한편 빌헬름 시대의 독일 제국은 경제적으로 최전성기에 접어들었다. 늦어도 1890년부터 독일의 경제 발전은 중화학 공업을 중심으로 한 '제2차 산업 혁명'이 가속화되면서 급속한 성장을 이루었다. 독일은 1913년 세계 산업 생산에서 미국에 이어 2위를 차지했으며, 세계 무역에서도 영국에 이어 2위를 차지하였다. 이러한 경제적 성장과 별개로 '''세기전환기'''(Jahrhundertwende)로 불리는 빌헬름 시기의 사회적 분위기는 퇴폐적이고 비관적인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세기말(fin-de-siecles)로 불리는 19세기 후반부 유럽의 전반적인 경향이었는데, 이러한 경향은 새로운 시대에 대한 기대감과 더불어 양가감정으로 공존하고 있었다. 이 시기 독일인들은 급속한 국력의 성장에 대한 자부심과 더불어 산업화가 가져온 급격한 사회변화가 초래한 노동 문제 및 도시 문제와 같은 각종 사회 문제(Soziale Frage)에 봉착하면서 이에 대해 위기감과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고, 이러한 감정은 학문 및 예술 분야에서도 반영되어 [[프리드리히 니체]]의 철학과 데카당스 문학, 미술 등이 유행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