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독일/역사 (문단 편집) ==== [[오토 왕조]] ==== 하인리히 1세의 뒤를 이어 [[독일왕]]이 된(936년) 그의 아들 [[오토 대제]](오토 1세)는 962년 교황으로부터 대관을 받아 [[신성 로마 제국]](아직 정식 명칭은 '(로마) 제국'Imperium이었지만)을 세우게 되었다. 그러나 신성 로마 제국(이른바, 독일 제1제국)은 이웃 프랑스 왕국과는 달리 단일 민족 국가로 변화하는 데 실패했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근본적으로 고대 시대로부터 이어온 게르만족의 전통이 기인한 바가 컸다. 고대 시대 게르만족은 하나의 정치 체계를 이루지 못하고 여러 부족으로 나뉜 가운데, 특유의 종사제를 발전시키게 된다. 이것이 발전하여 중세 시대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었다. 물론 중간에 프랑크 왕국 시절을 거치기는 했지만, 프랑크 왕국은 현재의 프랑스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한 나라로 로트링겐, 프랑켄, 슈바벤은 비교적 초기에 프랑크 왕국에 병합되었지만 작센, 바이에른이 프랑크 왕국에 포함된 것은 [[카롤루스 대제]] 때의 일이었다. 카롤루스 대제 이후 곧 왕국이 분열되었기 때문에 서쪽 일부를 제외한다면 독일 지역이 프랑크 왕국에 복속된 시기는 실질적으로 반세기 정도에 불과했다. 때문에 동프랑크 왕국 시대로 이어지자 반세기 전까지 각자 다른 나라였던 5대 공작령이 독립성을 강하게 유지했던 것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카롤링거 왕조의 대가 끊기자 5대 부족 공국들의 힘이 강해졌고, 다음 왕들은 줄줄이 5대 제후들의 승인을 거쳐서 왕위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오토가 왕위에 오를 당시 소위 작센 공국의 상황은 매우 혼란하고 위험했다. 나라 안에서는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나라 밖에서는 외적의 침입이 끊이지 않았다. 937년에는 오토의 이복형 탕크마르가 작센의 여러 귀족을 이끌고 대규모의 반란을 일으켰으며, 오토는 이를 진압했다. 1차 반란 이후 2차 반란이 일어났는데, 939년 오토에게 불만이 많던 프랑켄 공작과 로렌 공작이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었다. 이때 오토는 작센 백성의 두터운 지지와 슈바벤 공작의 전폭적인 협력 덕분에 2차 반란도 평정했으며, 반란 세력을 철저히 제거하기 위해 프랑켄과 로렌을 자신의 세력 아래 두고 사위를 로렌 공작으로 봉했다. 신성 로마 제국 초기에 제국을 구성하던 5대 공국은 차츰 분할 상속과 분쟁들을 통해 수없이 쪼개지게 되었다. 특히 이런 경향은 분할 상속의 관습이 있던 프랑크 왕국의 중심부에 가까운 서쪽 지역에서 강하게 나타났다. 때문에 서부 독일은 수없이 많은 소규모 영주국으로 분리되었다. 반면 프랑크 왕국에 병합된 시기가 짧았던 동부 독일은 분할 상속이 적용되지 않아 비교적 큰 규모의 공국과 왕국이 유지될 수 있었다. 때문에 동부 독일에서 바이에른, 오스트리아, 작센[* 중세 시대와 독일 왕국 시절 작센 부족 공국은 원래 북해 근처의 독일 서북쪽이 중심지였으나(그래서 영국으로 건너갈 수 있었고 그게 앵글로색슨의 '색슨'이다) 서북쪽은 여러 차례 분할 상속되면서 작은 소국들로 전락했고, 초기 작센의 변방지역이었던 동남부가 남아 작센 왕국으로 이어졌다.],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등의 대공국과 왕국들이 발전하게 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이 흘러가면서 황제의 실권이 점차 약화된 것도 제국이 수많은 영주국으로 쪼개지던 추세와 궤를 같이 한다.[* 다만 이는 1256년부터 이어진 [[대공위 시대]]로 황권이 약해지고 1356년 [[금인칙서]]로 황제의 제후국의 영향력이 약해진 탓도 크다.]실권은 현실적으로 그가 세금을 징발하고 군사를 동원할 수 있는 직영지에 기반한다고 할 수 있다. 초기 작센 왕조들의 황제들은 제국에서 가장 강했던 작센 공국에 기반하여 비교적 강력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작센 공국은 빠른 속도 분할되어 갔다. 게다가 초기에는 어떠한 제후들에게도 속하지 않은 황제 직영지가 있었는데, 그런 황제 직영지도 점차 소멸했다. 또한 교황과의 서임권 투쟁등을 거치며 결국 누구도 황제로 선출되지 못한 [[대공위 시대]]가 도래하고 말았다. 대공위 시대 직후에는 [[스위스]] 아르가우 일대에 조그마한 땅을 가진 듣보잡 [[합스부르크 가문|합스부르크 출신]]의 [[루돌프 1세|루돌프]] 백작이 선출되면서 황권이 약화되었다. 1356년 [[카를 4세]]에 의해 [[금인칙서]]가 반포되었다. 카를 4세는 제국을 안정시키고자 했던 의도에서 금인칙서를 제정했으나, 유력 제후들의 동의를 구하기 위해 황권을 일부 양보하였는데, 결과적으로 황권을 약화되고 제후들의 권한이 강화되어 제국의 분열을 촉진시켰다.(...) 중세 성기에 [[한자동맹]] 등 상업이 융성하던 독일은 1450년 무렵부터 [[르네상스]] 시기가 되면서 독일 민족 의식이 탄생하게 된다. 독일 인문주의자들은 고전에 대한 탐구로 게르만인상을 독일인상으로 대입시켰다.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와 같은 책에서 등장한, 로마인들이 그려낸 게르만인을 [[독일인]]과 동일시하였던 것이었다. 그와 함께 마르틴 루터에 의해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 운동이 발생하였다. 신학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있으나, 인문주의자들이 그려낸 독일인상은 개신교와 연결이 되었고, 가톨릭을 신봉하는 [[이탈리아인]](또는 [[프랑스인]])과 대비되었다. 따라서 민족적인 대립 구도가 발생하였고 독일 민족의 초기 형태가 형성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