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돌궐 (문단 편집) === 돌궐 제1제국(동돌궐, 서돌궐)(552~583~630~657) === || [[파일:Gokturk_cav.jpg|width=100%]] || 돌궐인이 지은 오르혼 비석에는 돌궐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가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중국 사서에서는 엿볼 수 있는데 《[[주서]]》에는 과거에 존재했다가 이 시점에는 사라진 [[흉노]]의 별종(別種)으로 나와 있으며[* 《주서》에서는 '귀방'과 '철륵'이 있었던 위치가 언급되는데 '돌궐'이라는 단어는 아니다. 훨씬 옛날에 있었던 귀방과 철륵이 과연 돌궐과 같은 뜻인가에는 의문점이 많다. 또한 《주서》의 철륵이 돌궐과 상관없는 '키르키스'를 뜻한다고 주장하는데 그 이유는 철륵이 위치한 곳이 예니세이 강 상류의 바이칼 호수 서쪽이며, 키르기스가 있었던 위치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수서]]》에는 돌궐의 선조가 '''아사나씨'''(阿史那氏)로 원래 평량(平凉, 현 [[간쑤성]] [[핑량시]])의 잡호(雜胡, 호족)였는데 아사나씨의 500호가 [[유연]]으로 도망하여 야금업(冶金業, 제철)에 종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색국(塞國, saka로 추정되며 '사카'는 '스키타이'이다.)에서 나왔다고도 한다. saka에서 나왔다는 말과 같이 Tranoid 서양계 유목민으로 본다. 한문 사료에 기록된 돌궐의 신화를 보면 대개 '''[[이리]]'''를 돌궐의 시조로 삼고 있다. 《[[북사]]》 등에는 북녘 색국의 아방보(阿諸步) 부락의 17명[* 혹은 70명이라고도 하는데, 둘 다 돌궐이 성스럽게 여겼던 숫자 '''7'''이 반영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의 아들 중 한 명이자 이리의 소생인 '''이질니사도'''(伊質泥師都, Igil Nisha čor로 추정)가 아방보 부락이 멸망한 뒤 여름의 신 및 겨울의 신과 혼인하여 아들 넷을 낳았는데, 그 중 한 명이 흰 기러기로 변했으며, 또 다른 한 명이 검수(劒水)와 아보수(阿輔水) 사이에서 키르기즈를 세웠고, 또 한 명이 처절수(處折水)에서 나라를 세웠다고 한다. 큰아들인 '''눌도육설'''(納都六設, Nur Türk shad로 추정)은 발사처절시산(跋斯處折施山)에 살며 추위로부터 여러 부락을 구제해냈다고 전하고 있다. 그의 10명의 아내에게서 나온 아들들은 각자 성(姓)을 가지게 되었고, 눌도육설이 죽자 그들 중 '''아현설'''(阿賢設, Ashana shad로 추정)이 부족을 이끌었다는 전설이 있다. 동쪽으로 진출하여 [[몽골어]] 계통 언어를 쓰던 [[유연]]을 멸망시키고, 북아시아의 패자가 된 돌궐의 '''투멘'''(土門)은 '나라(il)를 세운 [[카간]]'이란 의미의 '''일릭 카간'''(Iliq Qaghan, 이리가한[伊利可汗])을 칭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 제24대 [[양원왕]] 7년인 551년에 경쟁관계인 유연과 우호적인 고구려의 신성 및 백암성을 직접 공격하기도 했는데 [[고흘]] 장군의 맹활약으로 실패했다. 553년에는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일릭 카간이 이때 붕어하고, 제2대 카간인 '''아이 카간'''(Ay Qaghan으로 추정, 아일가한[阿逸可汗])이 즉위했으나 같은 해에 역시 붕어했다. 돌궐 제국은 제3대 '''무칸 카간'''(Mukhan Qaghan, 목간가한[木杆可汗], 재위 553~572) 치세에 확고하게 기반이 닦여졌다. 그는 서쪽으로는 [[이란]]의 [[사산 왕조]]와 연합해 [[에프탈]]을 멸망시키고, [[아무다리야 강]]을 경계로 국경을 설정해 [[트란스옥시아나]]에 발을 들였고, 동쪽으로는 [[거란]]을 꺾고, 북쪽의 [[키르기스]]를 병합해 새외 모든 나라를 복속시켰다. 이 때 돌궐 제국의 영역은 서쪽으로는 [[카스피해]], 동쪽으로는 [[고구려]]와의 인접 지역인 흥안령 산맥까지 이르렀다. 과거의 유목제국 [[흉노]]와 [[유연]]의 서쪽 영역이 [[파미르 고원]]을 넘지 못한 것과 비교하면 더욱 서쪽으로 확대된 것이다. 이 시기 중국 북부는 고씨의 [[북제]]와 우문씨의 [[북주]]가 다투고 있어 신흥제국 돌궐과는 서로 우호관계를 맺으려 했다. 당시 튀르크 또는 몽골계의 [[선비(민족)|선비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북제와 북주를 건국했는데, 돌궐은 중국을 공격하고 영토를 넓혀 속국으로 만들었으며, 북제와 북주 등 북중국의 격렬한 분열은 돌궐에게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돌궐의 제4대 카간이었던 '''타스파르 카간'''(Taspar Qaghan, 타발가한[佗鉢可汗], 재위 572~581년)은 [[조공]]을 바치는 [[북주]]와 [[북제]]를 두고 >"내가 '''남쪽의 두 아이들'''을 효순하게만 하면 어찌 물자가 없음을 걱정할 필요가 있겠는가"[* 《[[주서]]》 권50 <열전>42 -이역전-.] 라고 할 정도였으니 그 위세를 짐작할 수 있다. 돌궐 대제국은 동•서로 매우 긴 국토였는데[* 사실 이 동네 유목제국들이 과거 [[흉노]]부터 후대의 [[몽골 제국]]까지 대부분 남북보다 동서로 훨씬 긴 편이다. 남북으로 가면 갈수록 환경이 크게 달라지는데 위도대가 비슷한 동서는 비슷한 스텝 자연환경이 이어지므로 유목민들은 대부분 동서로 확장하는 게 더 편했다.] 전성기 동•서돌궐의 영역을 모두 합치면 [[흑해]]에서 [[내몽골]]에 이르는 실로 광활한 영토였다. 이것은 유목민족 특성으로 항상 이동을 하며 살아서 유적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또한 가끔 아마추어들이 활동하는 영문 위키백과나 사이트들에서 돌궐이 멸망했을 때 돌궐 모든 지역이 멸망한 것처럼 카스피 지역 근처까지의 돌궐 영토가 당나라 영토로 표기되는 잘못된 지도들을 만들어 업로드하고 올리는 경우가 있는데, 돌궐이 멸망한 것은 맞으나 돌궐 카간이 전투 중에 사망하여 남은 돌궐인들이 책봉을 받거나 당나라에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 경우에 중국 문헌에서는 돌궐 멸망으로 기록한 것이며, 돌궐 카간이 사망하여도 돌궐 영토가 전부 당나라 영토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해당 돌궐 지역에는 당나라 유적이 전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돌궐의 가한이 사망하여 돌궐 제국 자체의 위험이 사라졌지만 당나라도 그 먼 지역까지 영토를 둘 수는 없었다. 돌궐은 황제(카간, 가한)가 사망하면 일시적으로 멸망하여 돌궐 부족들이 다른 영토로 이동하는 것이지, 돌궐 전 지역이 멸망하는 것이 아니었으며 돌궐이 멸망했더라도 길고 긴 돌궐 영토내에 당나라 유적 또한 전혀 발굴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유라시아 유목 제국사》를 쓴 르네 그루세의 말에 의하면 만약 그들이 단결할 수만 있었다면, 돌궐 제국은 천하무적이었을 것이라고 단언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런 영토 한 지점에서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기 어렵다고 판단해 나라의 동과 서를 가까운 일족에게 맡겨 셋으로 분할해 지배하는 체계를 갖췄다. 이전의 [[흉노]]에서 좌현왕, 우현왕을 뒀던 것과 비슷하지만 돌궐은 동방과 서방 모두 [[카간]]의 칭호를 사용했다는 점이 차이가 있다. 당연히 시간이 흐르면서 중앙 권력의 약화로 분권화되었다. 제5대 카간인 '''[[사발략가한|으쉬바라 카간]]'''(Ïšbara Qağhan, 사발략가한[沙鉢略可汗], 재위 581~587년)이 즉위하면서부터 아사나씨 종실 내부에 권력 다툼이 생겼다. 582년에 일어난 충돌을 직접적인 계기로 해서 583년 돌궐 제국은 동과 서로 분열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사발략가한]] 문서 참조. 그리고 중국 대륙을 수나라가 통일했지만 수나라 또한 돌궐에 조공하던 상태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