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방견문록 (문단 편집) === 다녀온 것이 맞다는 주장 === 하지만 그가 실제로 다녀온 것이 맞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근거도 많다. * 마르코 폴로의 귀환에 동행했던 중국인 사신에 대한 《영락대전》의 기록 동방견문록 서장 제17장에서는 마르코 폴로가 중국을 떠날 때 동행했다는 세 명의 중국인 사신에 대한 기록이 등장하는데[* [[https://it.wikisource.org/wiki/Milione/17|이탈리아어]], [[https://en.wikisource.org/wiki/The_Travels_of_Marco_Polo/Preface/Chapter_17|영어]] "E’mandò tre ambasciadori al Grande Kane - uno de li quali avea nome Oularai, l’altro Pusciai, l’atro Coia" 부분이다. ] 원나라가 멸망한 후 명나라 시대에 편찬된 중국측 사서인 《영락대전》(永樂大典)의 《참적》(站赤)[* [[역참]]을 뜻하는 몽골식 표현이다. 몽골어에서 잠(jam)은 길을 뜻하는 말이었으며 이를 관리하는 관리를 잠치(jamchi)라고 하였는데, 이를 한문 기록에서 站赤이라고 적은 것이다.[[http://contents.nahf.or.kr/id/NAHF.jo.k_0024_0331_0010_0060|#]] 한국 한자음은 '참적'이나, 몽골식 표현이기에 '참치'라고도 읽는다.[[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5305|#]] 특히 몽골 관직명 중에서 '-치'를 한자로 '赤'으로 적은 게 상당수 존재한다. ([[원 간섭기]] [[고려]]의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0503|필도치(必闍赤)]]의 예)]에 등장한다.[[https://zh.wikisource.org/wiki/%E6%B0%B8%E6%A8%82%E5%A4%A7%E5%85%B8/%E5%8D%B719418|#]][* 영락대전 권19418, 站字 - 站赤三. 최하단부에 兀魯䚟阿必失呵火者가 등장한다.] 이때 동행한 사신의 이름은 이 책에만 등장하는 것이고, 영락대전은 중국에서도 그다지 널리 읽히지 않지만 진서라서 신뢰성이 높다. 또한 당시 그 사신에 대한 기록은 목적지였던 [[일 칸국]]의 자료에도 나타난다. 유명하지 않은 사람들의 이름이 동방견문록에 정확히 언급되었기 때문에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 다녀왔다는 것만큼은 사실임을 입증한다. 훌라구가 보낸 사신의 이름은 우루라이/울라타이(兀魯鯠, Oulatai), 아비스아/아푸스카(阿必失阿, Apusca), 훠저/코자(火者, Coja)이다. * 원나라가 남송을 멸망시킨 후, 성벽을 철거한 것을 기록한 유일한 외국인 동시대를 살던 중국인을 제외하면, 이런 기록을 남긴 사람은 마르코 폴로가 유일하다. 성벽은 기본적으로 약탈에 대한 방어 역할이 목적이라 철거는 상식적으로 생각하기 힘든 상황인데, 원나라가 이민족 침략 왕조라서 가능한 일이었기에 이러한 사실을 기록하기 위해서는 직접 가봐야만 한다. * 원나라의 도로 규정을 기록 [[쿠빌라이 칸]]이 제정한 법률에 의해 만들어진 도로라서 그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원 당시 [[진나라]]와 [[북위]]의 만리장성은 별로 남은 게 없는 폐허 뿐이었고, [[명나라]] 만리장성은 당연히 건축되지도 않았다. 또한 완전히 폐허는 아니라 해도 남아있는 게 있다 해도 만리장성은 '중화'와 '유목야만'과의 경계선이었고 원나라가 그 경계선을 넘은 침략 왕조인 이상 이를 그리 보여주고 싶어하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전족]]의 경우는 마르코 폴로가 몽골족이나 북중국의 [[거란족]], [[여진족]], 서역의 색목인과 주로 접촉하고 한족과 많은 접촉을 하지 않았다면 모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애당초 '이만큼 이색적인 것을 안 적었을 리 없다'라는 것은 사람에 따라 판단이 달라지는 부분으로, 정말 봤다 해도 기억에 안 남을 수 있고 별 이유 없이 기록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므로 '중국에 가보지 않았다'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게다가 당시 [[원나라]]에는 색목인 관리가 많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없는 것도 딱히 이해되지 않을 일은 아니다. 정사에 이름을 남긴다는 것 자체가 상당한 업적을 쌓지 않고서는 매우 힘든 일이기 때문. ~~아니면 반대로 역사에 길이남을 역적이 되거나~~ 일개 관리에 관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마냥 상세하게 남아있을 리가 만무하다. 또한 만에 하나 기록에 실렸다고 해도 현재 원나라가 직접 남긴 문서나 기록물은 대부분 유실된 상태이기에 이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원나라 [[법전]]인 [[지정조격]] 조차도 중국 내에서는 실전되었지만 한국에서 기적적으로 발견되었다.] 그나마 원나라의 기록물을 토대로 [[명나라]]가 편찬한 [[원사(역사책)|원사]]가 남아 핵심 사료로 활용되고 있지만 후대의 기록이기에 어느 정도 생략이 되어있을 수밖에 없다. [[2012년]] 4월에 독일 튀빙겐 대학교(Universitaet Tübingen)의 한스 율리히 보겔(Hans Ulrich Vogel) 중국학 교수는 마르코 폴로가 정말로 중국에 갔다는 학설을 다시 내놓았다. [[http://www.sciencedaily.com/releases/2012/04/120416100439.htm|#]] 그 근거로는 당시 원나라의 지폐의 제조과정과 모양, 사용에 관하여 정확한 기록을 썼다는 점, 당시 중국의 소금의 제조방법과 주요 산지를 독자적으로 정확히 기술했다는 점 등을 들었다. 현재 역사학계에서는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 갔다는 것이 정설이고 그렇지 않다는 의심은 소수 의견 정도로 남아있다. 만일 폴로가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종합한 것에 불과하다면 그 이야기들이 다른 누군가에 의해 다른 어딘가에도 기록으로 남아있을 법 한데, 마르코 폴로 이전이나 이후 수백 년 동안 이런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긴 서양인은 마르코 폴로 밖에 없다. [각주]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마르코 폴로, version=191)]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