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북항일연군 (문단 편집) === 팔녀투강([[八]][[女]][[投]][[江]]) === [[1938년]] [[10월 20일]], [[일본군]]과의 전투 끝에 [[목단강]]에 투신하여 자결한 8명의 여성 열사들. 일본군에게 잡혀서 치욕적인 포로가 되느니 명예로운 죽음을 선택한 항일 게릴라들이다. 지금도 [[중국]] 현지에서 항일투쟁사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현지 학자들 중에는, 팔녀투강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라고 한다. 이들은 동북항일연군 제5군 1사단 소속으로 8명 전원이 [[헤이룽장성]] 출신이다. 이름들은 다음과 같다. * 안순복([[安]][[順]][[福]], 안쑨푸)[* 항일투쟁 초기에는 장복순 (张福顺, 장푸순)이라는 가명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1915년생(향년 23세). 피복공장장. 조선인. [[목단강시]](무단장시) 출신.[* 前 목릉진(穆棱镇) 신안둔(新安屯)] [[중국공산당]]원. 안씨 집안은 가난한 농민이었지만 가족 모두 항일운동에 참여했고, 안순복도 어려서부터 항일 소년단원으로 활동했다. 아버지와 오빠들이 일본군에 희생된 후 안순복은 남편 박덕산([[朴]][[德]][[山]], 퍄오더샨)을 따라 동북항일연군에 입대했으나, 남편도 1935년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유복녀]]를 낳은 후 안순복은 다시 동북항일연군으로 활동하다가, 1938년 10월 20일 아래 7명의 동료들과 함께 전사한다. 당시 여성대원들 중에는 안순복 외에도 아이 엄마들이 있었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다니기 어려워 [[흑룡강성]] [[지시시|밀산현]]의 어느 농가에 모두 맡겼는데, 이 아이들도 1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행방불명]]되었다고 한다. * 랭운([[冷]][[雲]], 렁원): 1915년생(향년 23세). 대대지도원 겸 분대장. 본명은 정지민([[鄭]][[志]][[民]], 정즈밍). 가목사시([[자무쓰시]]) 출신.[* 前 화촨현 열래진(悦来镇).] 1934년에 중국공산당에 입당했으며 같은 동북항일연군 소속인 남편 주유인([[周]][[維]][[仁]], 저우웨이런)과의 사이에 1녀를 두었지만 얼마뒤인 1938년에 남편은 전사했고 슬하의 외동딸도 행방불명이 되고 말았다. 여담으로 8명의 열사들 중에서 유일하게 실제 사진이 존재하며 나머지 7명은 생존자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 스케치로 남아있다. * 이봉선([[李]][[鳳]][[善]], 리펑샨): 1918년생(향년 20세). 보급병. 조선인. [[목단강시]] 출신.[* 본적은 린커우현 용조진(龙爪镇)] 17세 때 동북항일연군에 입대하여 선전ㆍ정찰 활동을 했고 일본군 250명을 사살한 ‘흑할자요 저격전’에도 전투병으로 참전했다. * 호수지([[胡]][[秀]][[芝]], 후슈즈): 1918년생(향년 20세). 기관총 사수, 1분대 반장. 목단강시 출신.[* 본적은 린커우현 조령진(刁翎镇) 마제촌(马蹄村)] 중국공산당원. * 황계청([[黃]][[桂]][[淸]], 황구이칭): 1918년생(향년 20세). 의무 사관. 목단강시 출신.[* 본적은 린커우현 조령진 남위자하(南围子河)이며 현재는 하심둔(河心屯)으로 개칭되었다.] 집안이 항일운동을 하는 가문[* 집안이 일제의 수탈에 맞서고 저항하는 항연보루호(抗联堡垒户) 가문으로 명망이 높았다.]으로써 어릴적부터 항일운동에 뛰어들었다. * 양귀진([[楊]][[貴]][[珍]], 양구이전): 1920년생(향년 18세). 부분대장, 2분대 반장. 목단강시 출신.[* 본적은 린커우현 동류수 하자둔(东柳树 河子屯)이며 현재는 연화향(莲花乡) 동흥촌(东兴村)으로 개칭되었다.] 중국공산당원. 어린 나이에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나서 17세에 과부가 된 뒤, 시댁에서 그를 인신매매를 하려고 하자 그대로 집을 떠나 도망쳐서 동북항일연군에 입대했다. 부친인 양징춘(杨景春)은 전쟁이 끝나고도 계속 딸의 소식을 모르고 있다가 1962년 10월이 되어서야 자기 딸이 팔녀투강의 영웅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았다. * 곽계금([[郭]]桂[[琴]], 궈구이친)[* 어릴적 이름은 곽국화 (郭菊花, 궈쥐화)였다가 입대후에 개명했다.]: 1922년생(향년 16세). 소총병. 칠태하시([[치타이허시]]) 출신.[* 출생당시에는 보리현. 출생하고 나서 유년시절에서는 린커우현 조령진 사함촌(四合村) 사합둔에서 성장했다.] 1936년에 항일연군에 입대하였고 제5군 교도단 분대장 풍문래(冯文礼, 펑원리)와 약혼하였으나 본인은 얼마 안가서 순국했다. 남편은 그후 무려 60여년이 지난 1992년이 되어서야 그녀의 사망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 왕혜민([[王]][[惠]]民, 왕후이민): 1925년생(향년 13세). 척후 안내원. 12세 때 동북항일연군 제5군의 군부부관인 아버지 왕희문(王[[希]][[文]])을 따라서 동북항일연군에 입대했으나 얼마 후에 아버지는 전사했다. 투신 당시에 불과 13세라는 어린나이로 8명 중에서 최연소자. 동북항일연군 제5군 1사단에는 30명의 여성대원들이 있었다. 1938년 10월 20일 [[일본]] [[관동군]] 약 1,000명에 의해 수많은 동료들이 포위되자, 여성대원들 중에서 8명이 나서서 적들을 유인하며 교란하여 동료들이 안전하게 빠져나갈 수 있도록 성공적으로 포위를 뚫었다. 그러나 미처 자신들은 빠져나가지 못했고, 포위되어 생포될 위기에 처했다. 그녀들은 최후까지 저항하였고, 마침내 총알이 다 떨어지자 고립무원의 위기 속에서 차가운 오사혼하([[烏]][[斯]][[渾]][[河]])[* [[목단강]]의 지류. [[만주어]]로 ‘사나운 강’, ‘흉포한 강’이라는 뜻이라고 한다.]에 뛰어들어 순국함으로써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8인의 영웅적인 일대기는 1986년에 영화로 만들어졌으며, 같은 해인 9월 7일에는 그녀들의 영웅적인 희생을 기념하기 위해서 [[흑룡강성]] [[목단강시]] 사회과학원 인근 빈강([[濱]][[江]]) [[공원]] 광장에 대규모의 [[동상]]과 기념비를 세웠으며, 초대 [[중국 총리]] [[주은래]]의 부인인 등영초([[鄧]][[潁]][[超]]) 여사가 [[비석]]에 팔녀투강([[八]][[女]][[投]][[江]]) 휘호를 썼다. (안순복과 이봉선은 [[한복]] 차림으로 조각되었고, 조선인이라고 쓰여 있다.) [[박물관]]도 건립되었으며, 2013년에는 [[중국 드라마|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