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정항일 (문단 편집) == 배경 == 1931년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을 선포하며 천만에 헤아리는 인구를 지배하던 공산당은 1933년부터 행해진 [[제5차 초공작전]]에 박살이 나서 험난한 [[대장정]]을 거친 끝에 겨우 섬서성에 정착할 수 있었다. 계속되는 국민정부의 포위공격에 맞서기 위해 공산당은 국민정부의 주의를 돌리고자 [[화북분리공작]]을 진행 중인 일본을 비난하며 항일을 주장하였다. 1935년 12월, 마오쩌둥은 <일본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전술>을 발표하여 일본의 침략 때문에 민족주의, 자본주의 세력 내에서도 분열이 있을 것이라 주장하며 모든 혁명세력을 결집하여 기존의 공농병공화국에서 인민공화국으로 전환, 공산당에 복종하면 부농, 민족자산계급과도 연합해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 4계급 연합의 인민정부론은 항일로 닥쳐온 중국의 위기를 공산당의 기회로 활용하자는 것+기존의 부농을 마구 조지는 좌경화 정책의 문제점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한편 소련과 코민테른은 1935년 7월 모스크바에서 열렸던 코민테른 7차 대회 이후 게오르기 디미트로프의 명의로 부르주아 계급과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연합하여 파시즘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중국 공산당에게도 장제스와 연합하여 일본 제국주의에 공동으로 대항하는 항일연합전선을 형성하라는 것이 코민테른의 방침이었는데 마오쩌둥은 장제스에 대한 불신을 드러내며 국민정부를 토호열신, 군벌, 매판자본가, 고급관료들의 대표자, 중국인민의 적, 제국주의 세력의 주구로 마구 비난하며 코민테른의 방침을 수용하지 않고 계속 반장항일을 주장하며 중국의 반장파를 규합하는 형태의 연합전선을 추구하고 있었다. 1935년 12월, [[중공중앙]]은 와요보 회의를 개최하여 1936년에는 일본과 작전하는 세력을 준비하고 홍군을 급격히 확대해야 한다고 결의, 산서와 수원으로 주요 발전 방향을 두기로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