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두발자유화 (문단 편집) ==== 내용 ==== 한국의 경우에는 1970년대 유신 독재 정권하에서 남자의 장발이 어른아이할 것 없이 전 연령층을 대상으로 전부 규제되었다. 1987년 당시 [[현대중공업 노조]] 위원장이었던 [[이갑용]]이 노조를 결성하고 노동자들이 1순위로 해결하고자 한 것이 다름아닌 '두발규제'였다. 당시에는 공장 문 앞에서 노동자들의 머리를 바리깡으로 밀어버리는 일이 성행했다는 것이다. 또한 1970년대 유신 시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여자들의 스커트 길이와 남자들의 장발을 길거리에서 [[불심검문]]하듯 규제하는 모습이 심심찮게 나온다. 이 때 성인 남성들에게 두발은 단순히 머리카락이 아니라 굴종, 체념, 부끄러움, 억울함의 상징이었다. 이후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성인들에 대한 두발 및 복장 규제는 자연스럽게 사라졌지만 미성년 학생들의 경우, 이 괴랄한 악습이 전통으로 미화되면서 유지되어 왔다. 물론 이 당시의 학생들도 일제시대가 끝난지 언제인데 아직도 일제의 잔재인 두발단속을 하냐고 비아냥할 정도로 두발 단속을 좋아하지 않았다. 1960년 4.19 혁명으로 학생들의 발언권이 높아지자 중, 고등학생들이 두발자유화를 두고 동맹휴학에 나서기까지 했다가 5.16 군사정변 이후에는 박정희 정권이 통제를 우선시하는 정책을 집권기 내내 유지하여[* 1970년대 와서는 성인들에게도 미니스커트와 장발 단속까지 시행했으니 학생들은 안봐도 뻔했다.] 무위로 돌아갔다가, 1979~80년 [[서울의 봄]] 당시에 중, 고등학생들이 민주화 운동을 하는 김에 두발자유화와 교복자율화 구호를 외치고 돌아다녔다. 이미 1970년대 후반부터 교복의 존재 의의가 일제의 잔재와 리베이트 등 비리 문제로 논쟁거리가 되던 상황으로, 이 상황에서 최규하 정권하에서 문교부 장관으로 재직한 [[김옥길]]이 학교장 재량으로 교복자율화 및 두발자유화 할수있도록 지시하면서 일부 학교에서 두발규제를 완화하기 시작한 상황이었는데, 정통성이 약했던 전두환 정권에서도 국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한 [[3S정책]]의 일환으로 이 조치를 학교장 재량에 맡겨놓았던것을 전국으로 바꾸면서 확대했던것이었다. 이 당시 두발자유화는 [[야간통행금지]] 폐지 및 [[KBO 리그]] 출범과 비슷한 시기에 진행하였으며 동시에 [[졸업정원제]] 및 교복자율화와 함께 미국, 서유럽권 국가들의 교육정책을 벤치마킹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하지만 말이 두발자유화였지 제한규정은 남아있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두발규제 완화였다. 우선 이 당시에 내려진 문교부의 가이드라인을 보면 파마와 염색은 여전히 불허였고, 남학생들의 머리카락이 귀를 덮는것과 옷깃 아래까지 기르는 [[장발]]을 금지하도록 규정되었다. 또한 기본적으로 머리모양은 학생들의 자율로 하도록 되어있었지만, 학교장 재량에 따라 길이 규제 및 단속을 할 수 있게 되았다. 이 때문에 학교마다 두발기준이 일률적이지 않고 제각기 다른것은 지금과 마찬가지라서, 규제가 덜한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파마를 하기도 했지만, 반대로 엄격한 학교에서는 "귀를 조금이라도 덮으면 안된다", 혹은 "긴 생머리는 안된다". "귀밑 3cm만 기를수 있다"는 식으로 눈가리고 아웅식으로 여전히 심하게 두발규제를 하기도 했다, 그래서 대다수 학교에서 두발단속은 남아있었으며, 교사와 [[선도부]] 부장이 머리가 좀 길다싶은 학생들의 머리카락을 가위와 바리캉으로 학생들의 머리카락을 자르거나 미는 일은 여전히 일어났다. 그래서 학생들이 이렇게 머리를 자르는데 무슨 두발자유화냐며 실망하거나 실랑이가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고, 아예 학생이 머리 전체를 삭발하며 항의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고도 한다. 물론 일단 지시는 따라야한다는 시늉은 보여야했기때문에 1970년대에 남학생은 반삭, 삼목컷, 귀두컷, 여학생은 단발, 양갈레 위주였던것에 비해서 학생들의 헤어스타일이 보다 다양해지고 머리길이도 어느정도 길어졌었으며, 당시 영상을 보면 1990년대 학생에 비하면 머리카락의 길이가 평균적으로 더 긴 편이라는것도 알수있다. 어쨌든 1982년 중, 고등학교 자체의 분위기는 2000년대 중, 고등학교에서 볼 수 있든 것과는 큰 차이가 났던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1983년에 교복자율화를 시행해서 특수학교를 제외한 대부분의 학교에서 [[교복]]이 전면적으로 폐지되었고, 한동안 사복차림으로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학교에 따라 눈가리고 아웅식의 규제가 남아있어서 부조리를 느끼기도 했던 두발자유화보다 학생들에게 즉각적으로 체감이 갔던것이 교복자율화로, 일시적이나마 체감적인 자유도가 크게 올라갔었다. 그래서 [[달려라 하니]], [[천방지축 하니]], [[고교생 일기]], [[사랑이 꽃피는 나무]], [[푸른교실]], [[맥랑시대]], [[영심이]], [[떠돌이 까치]], [[까치의 날개]],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등 당대의 작품이나 당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을 보면 1980년대 중반 ~ 1990년대 초반의 중ㆍ고등학교에서도 교복을 입지않고 사복으로 다니는것이 일반적이라는 것을 알수있다. [[파일:external/playimage.chosun.com/7909870b72d7466988eecf4fc5828592_n.jpg]] 1980년대 후반 고등학생이었던 [[강용석]]의 두발 상태. 딱 보면 알겠지만 요즘 고등학생과 별 차이가 없으며 교복을 아예 입지 않고 자유롭게 사복차림을 하고 다녔다는것을 알수있다. 1980년대를 배경으로한 영화 [[써니]], [[품행제로]]나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주인공들의 모습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강용석의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대충 1960년대 중반~1970년대 중반생까지는 이렇게 사복차림으로 학교에 다니고 1990년대 중후반에 학교를 다녔던 학생들보다 평균적인 머리카락 길이도 더 길었다는것도 알수있었다. 물론 겉보기식으로 두발과 복장에 대해서만 자유로웠을 뿐 학교 내 [[체벌]]과 교사들의 학생들을 대상으로한 [[똥군기]]는 여전해서, 사소한 이유로 선생들이 학생들을 줘팼던것은 여전했다. 또한 이 당시에는 대중문화과 내수시장에 대한 인식이 척박함 그 자체였던 시절인지라 청소년이 게임과 만화, 소설같은 유희문화를 즐기는것에 대해 시간낭비한다는 인식이 태반이었고,[* 사실 이 당시에는 대중문화에 대한 인식을 논하기 이전에 검열 자체가 심했던 시절인지라 그나마 대접을 받았다던 소설가 역시도 고문을 당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았을 때였고, 직장인들의 여가시간도 절대적으로 부족했었다. ] 고급예술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대중문화를 하찮게 보는 관념도 지대하게 남아있어삳. 그래서 중고등학생들이 출입할 수 있던 장소 제한과 사회적 규제 및 암묵적인 규정 등도 여전해서 교사들이 롤라장이나 다방, 당구장, 만화방, 오락실 등에 들이닥쳐서 불시검문을 하는 일도 빈번했다. 사실 박정희 정권의 중ㆍ고등학교 평준화와 전두환 정권의 교복폐지, 두발단속 완화, 과외 금지 같이 지금 기준으로도 다소 파격적인 교육정책이 시행될 수 있던것은 역설적으로 군사독재 정권이라서 당시 기성세대 및 보수층의 반발 여론도 무력으로 찍어누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뒤로는 "요즘은 평준화되어서 학교수준 떨어진다", "학생들이 머리 기르고 사복입고 돌아다니는거 보니 말세다."라며 몰래 뒷담화를 깔 수 있다지만 이걸 가지고 대놓고 대통령과 정부를 공석에서 욕하다가 잘못 걸리면 어디로 끌려가든지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지원금이 끊어지는 등의 각종 불이익을 받았고 언론도 통제되었기 때문에 대놓고 반발을 표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1987년 대통령 선거 여론조사 세대별 조사결과블 보면 그 장년층들은 그 꼴을 보고도 노태우를 찍었다(...)] 이 당시에 부당하다며 시위를 벌이면 해당 학교의 교장이나 해당 학생의 부모가 처벌받을 수 있기 때문에 몸을 사릴 수 밖에 없었으니 더더욱 그렇다. 한 마디로 학생들의 복장과 두발을 당연히 규제해야 한다는 사회보수적인 논조와 분위기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전 사회적으로 깔려 있었지만 당장 정책을 추진한 군사정권의 눈치를 보고 입을 꾹 다물던 강약약강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이때 주류매체에서는 학생탈선의 원인으로 교복자율화를 잇따라 지목하면서 전두환 정권 후반기인 1985년부터는 학생일탈 및 과도한 옷값 지출로 인한 부담증가를 이유로 교복 재도입이 시작되었고,(재도입 시작은 1986년 2학기부터다.) 동시에 학교장 재량으로 두발을 단속할수있다는 지시를 함에 따라 두발 규제도 도로 심해졌다. 이러한 추세는 이후로도 청소년 탈선을 방지한다는 명목하에서 김영삼 정부때까지 이어졌다. 애초에 두발자유화 및 교복자율화 조치 자체가 전두환과 그 수하들이 자유에 대한 투철한 신념이 있어서 시행한것이 아니었고, 그저 박정희때보다 좀 풀어주면 여론의 지지도 얻고 시위하느냐고 안나대겠지 하는 발상에서 시행했기 때문에 예정된 결말이기는 했다. 물론 1970년대의 유신 독재 정권 시기 마냥 남학생들에게 밤송이 모양의 준삭발 머리를, 여학생들에게 단발머리를 무조건적으로 강요하는 정도는 아니었고 염색이나 파마 정도만 규제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지방 학교와 사립 남학교에서는 여기에 더해서 1960-1970년대스럽게 남학생들에게 거의 군대식인 삭발에 가까운 반삭머리를(앞머리와 뒷머리 3mm), 여학생들에게는 귀밑 cm단위를 재서 규제하는 칼같은 단발머리를 강요하기도 했고, 이 때문에 두발규정이 엄격한 중학교ㆍ고등학교에 배정된 초등학생ㆍ중학생들이 학교배정이 끝난 뒤 울음을 터트리며 짜증을 내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또한 학생들과 선도부ㆍ교사들ㆍ학부모들간의 실랑이도 많이 증가하였다. 반면 바짝 자른채로 공부나 하라고 화를 내며 체벌하는 학부모들과 학원선생들도 많았다. 다만 이러한 과도한 체벌에다가 1980년대 중반~90년대에 두발단속 강화, 교복착용 부활이라는 조치로 민주화와 자유화 시류에 타고나기는 커녕 오히려 1980년대보다도 개성을 더 억압받게 된 학생들이 나중에 학부모가 되면서 교사들의 지위가 낮아지는 아이러니한 계기가 되었다.(...)[* 1990년대의 음악시장이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 이후로 청소년과 청년들 위주로 재편되었던 것과는 완전히 정반대로 갔다는것이 재미있는 지점이다.] 사실 이 당시에 학생들의 불만 자체는 많았지만 노태우 정권에서 정권 자체의 지지율이 낮았던지라[* 노태우 자체가 같은 하나회 출신이면서 기존 5공과 거리두기를 하기 시작했고 원체 노태우를 좋아하지 않았던 진보층뿐만 아니라 보수층에서도 이도 저도 아닌 물태우라고 욕을 먹을 정도로 코어층이 약했다. 실제로 노태우 정권 후반기 지지율은 20% 이하에 불과했다.] 교육민주화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해서 전교조를 불법단체로 지정할 정도였으니 이러한 교육계의 움직임을 용인했고, 언론들도 학생탈선에 집중하며 교복재착용에 긍정적인 기사를 냈으며, 문교부에서 교복 재착용 및 두발단속 강화를 권고했다. 또한 경상수지가 다시금 적자로 전환되었던 상황인데, 당국와 언론에서 이를 과소비 방지 캠페인으로 틀어막으려 했기 때문에 만만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것이 더 편하기도 했다. 더불어 대학진학률의 상승에 따라 입시 경쟁과 교육열이 지나치게 과열되는 등의 현상으로 인해서 학생들의 권리보다는 당장 대학가는것을 우선시하는 풍조가 심해졌기 때문에 또 다시 묻혀졌던 것이었다. 그 이후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 문민화에 대한 논의가 일었고, [[서태지와 아이들]]을 시작으로 파격적인 패션 트렌드를 몰고온 당시 신세대 연예인들이 크게 히트를 치고 세대차이와 세대간 갈등이 사회쟁점화 되면서 'X세대론'이 이슈화되었다. 당연히 이 시대에도 두발단속에 대한 반발은 많았지만, 결국 대학설립 자유화 조치(대학설립 준칙주의)까지만 이루어진 채로 유야무야되어버렸고, 두발단속이 크게 완화되는 일은 없었고, 당시의 교육정책이 문민화 바람이 불었다고는 해도 주로 대학교육의 확대에 집중되었지, 중등교육의 문민화 논의는 뒤로 밀려나서 교련이 폐지된 정도에 그쳤고, 복장착용과 두발규제, 체벌 같은 근본적인 문제는 뒤로 밀려났으며, 따라서 두발자유화는 검토만 된채로 흐지부지 되었다. 그래서 교육현장에서는 두발단속이 전혀 완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두발자유를 기대했던 학생들에게 실망감만 안겨주었다. 이후 [[국민의 정부]] 들어서는 체벌제한과 [[0교시]] 폐지를 비롯한 교육의 탈권위주의화가 진지하게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ADSL]] 인터넷도 10대~30대 위주로 널리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학생 주도의 두발자유화 운동도 활발해졌다. 이중에서 노컷이라는 사이트에서 두발자유화 요구서명을 벌여 서명자만 13만명에 달할정도로 제법 큰 호응을 얻었다. 이러한 호응에 힘입어, 학생과 인권연합이라는 청소년 단체에서 대규모 시위에 나서며 두발자유화가 이슈화되었다. 교육부에서도 재소자 두발자유화가 진행된데다가 한창 교육의 탈권위주의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을때였기 때문에 두발자유화를 거부할 명분은 없었고, 학부모와 학생들의 의견을 더 들어서 두발규제를 완화 혹은 폐지하라는 지시를 내리기는 했지만, 실제 교육현장에서 두발단속 강화 및 교복부활을 주도한 학교 임원진들이 아직 재직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일부 학교에서 두발자유화가 재실시된 것을 빼면 대다수 학교에서는 길이 규제만 풀고 파마와 염색규제는 여전히 남아있는채로 어쩡쩡하게 매듭을 지었고, 이는 이른바 1982년 두발자유화와 비슷한 정도의 수준이었다. 반대로 얘기하자면 이 당시 대다수의 학교장과 중년 이상 교사들이 양보했다는 규정의 수위가 자기네들이 경험했던 1980년대 정도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2000년대 초중반에도 대부분의 학교에서 단발과 양갈래, 3mm 머리를 강제하는 식으로 극단적으로 짧은 머리를 강요하는 것만 줄어들었을 뿐 염색과 파마, 남학생 장발을 금지한다는 식의 규정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또한 이러한 규칙은 수도권 같은 지역에서나 적용되었지 지역에 따라서는 이마저도 유야무야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2005년도에 일진회 파동을 빌미로 두발단속을 1990년대 수준으로 재차 강화되는 학교들이 잇따라 늘어나자 2005년도에 시위가 벌어지기는 햇지만, 2000년의 시위와는 달리 크게 번지지도 않았다. 다만 2000년대에는 "학생은 무조건 복장과 두발 통제 대상이어야 한다."는 여론은 희석되었다. 이는 1980년대 중반~1990년대 초반에 중, 고등학교를 다녔던 교복자율화 세대들이 본격적으로 사회 중역이 되었을 시기가 2000년대였기 때문이었다. 사실 두발단속이 유지되었던 원인 중 하나가 보상심리인데 이들은 학창시절에 교복을 아예 입지 않았거나 몇년만 반짝 입었기 때문에 면학분위기를 조성하거나 학생들의 성적 향상을 위해서 교복을 입혀야 된다거나 두발을 빡빡하게 단속해야 된다는 통념에 공감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고, 두발규제가 상대적으로 약했던 시기를 겪었던지라 상대적으로 두발단속에 대한 보상심리가 없거나 약했고, 그 이후 세대들은 선배때는 안했던 것을 뭐하러 다시 하냐면서 억울함을 가진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또한 이들은 이명박 정부 이래로 민주당계 정당 혹은 진보정당의 확고한 콘크리트 지지층이 되었고, 결과적으로 이들이 2010년대 지방선거 교육감 선거에서 두발단속 완화 혹은 페지 정책을 추진하는 진보 교육감 후보에게 대거 투표하면서 진보교육감이 다수 집권한데 반해 두발단속을 여전히 강하게 시행해야 된다는 공약을 내건 보수교육감 후보들은 대거 낙선하며 교육계에 발휘하는 영향력이 크게 줄어들었고, 이것이 두발자유화 조치가 재확산된 이유가 되었다. 거기에다가 교복은 그래도 아침마다 무엇을 입을지 고민 안해도되고 경우에 따라 싸게 입을수있다는 장점은 있지만, 두발의 경우에는 자유롭게 염색과 파마를 하든 빡빡하게 자르든간에 미용실, 이발소에서 돈쓰는건 똑같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이렇게 두발자유화가 지지부진해졌다가 2009년 경기도 교육감 선거에서 김상곤 교육감이 당선되었고, 두발자유화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하여서 2009년 12월 [[경기도]] 교육청에서 [[학생인권조례]] 초안이 발표되었다. 이후 2010년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서울과 경기도, 강원도, 호남에서 진보교육감이 당선됨에 따라 [[학생인권조례]]가 2010년 10월 5일 경기도에서 공포되고 2011년 3월 1일에 시행되었으며 이후 서울과 전남북을 비롯한 상당수 지역에서도 시행되어서 이들 지역에서는 두발자유화가 확산되었다. 그러나 대다수 지자체에서는 여전히 시행되지 않고 있지만, 2014년 지방선거를 기점으로 진보교육감이 대다수를 차지한 이래로 대다수의 중, 고등학교에서 두발규정이 완화되거나 폐지되었지만 보수세가 강한 대구,경북 지역은 여전히 두발규정을 시행하는 학교가 대다수다. 이렇게 점점 세월이 흐르면서 "학생의 두발과 용모는 당연히 이래야 한다!"식의 강경한 여론을 가진 세대들이 노년층이 되었고 두발 규제를 겪고 피해를 입은 수많은 학생들이 사회에서 한 자리를 차지할만한 성인들이 되면서 "대체 무슨 이득이 있었길래 이걸 한거냐? 졸업한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난 이건 아직도 이해안간다."라는 또다른 거대 여론을 조성하며 이게 사회 범적으로 대세가 되어버린 셈이다. 2020년대에 들어서도 여전히 사립학교들이나 지방의 학교들이 관습에 따라서 두발규제를 시행하고는 있다지만 오히려 두발규제를 하는 학교들이 어쩌다 논란을 일으켜 뉴스를 탈 때마다 "참 쓸데없는 걸 한다.", "저기는 어딘데 아직도 철 지난 짓을 하냐?"는 사회적 눈초리와 여론의 지탄을 받는 등, 확실하게 상대적 소수로서 전락하는 형세가 되었다. 강제적인 [[야간자율학습]]도 두발규제와 더불어 대한민국 청소년들에게 줄곧 대물림되어온 대표적인 악습이긴 했지만 이건 백번 봐줘서 그 시간동안 학교 교과과정이나 시험 예상문제들을 교사들의 감시하에 예습, 복습할 수 있다는 최소한의 그럴듯한 교육적인 변명이라도 있었으나 두발규제는 졸업하고 성인이 되고 한참이 지나서도 "대체 왜 그걸 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교육적인 효율이나 이득을 본다는 통계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