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로큰롤 (문단 편집) === 몰락 === 로큰롤의 종말은 의외로 일찍, 그것도 불현듯이 찾아오게 되었다. 1950년대 후반이 되자 상당히 보수적이었던 미국 사회와 언론은 무언가 그들을 제어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반항과 자유의 상징이었던 로큰롤은 기성세대의 눈엣가시였고 그들은 무언가 사고가 터지길 바라고 있었다. 1958년이 되자 로큰롤 뮤지션들 주변에서 잡음이 끊이지 않게 된다. [[제리 리 루이스]]는 13살짜리 미성년자 사촌 동생과 결혼한 것이 알려지면서 사회적으로 매장당하게 되고, 쟈니 캐쉬는 [[마약]]에 빠져 헤롱대고 있었다. 리틀 리처드는 갑자기 [[목사]]가 되겠다며(...) 은퇴를 했고, 척 베리는 미성년자 여자아이를 데리고 주 경계선을 넘다가 걸려서[* 그 당시에는 범죄로 취급되었다.] 법적, 도덕적인 치명타를 입고 수감된다. 앨런 프리드는 1958년 관객들에게 "경찰은 여러분이 즐기길 원하지 않을겁니다"라고 이야기 했다가 폭동을 선동했다는 죄로 수감되고, 이후 [[어뷰징(음원)#s-2.4|뇌물을 받고 특정 곡들을 틀어준 사실]][* 이건 문서가 가리키는 '페이올라'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례이기도 하다.]이 밝혀지면서 방송에서 하차하고 벌금형을 선고받는다.[* 당시로서는 돈을 받고 특정 곡들을 틀어주는게 이상한게 아니었고, 사실상 로큰롤 확산의 주범이었던 앨런 프리드를 희생양으로 삼은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러한 스캔들에 로큰롤이 지속적으로 시달리게 되자, 엘비스의 매니저 '[[대령]]' 톰 파커는 기가막힌 전략을 생각해 내는데, 바로 '''[[입대]]'''하는 것이다. 미국은 당시 전시가 아니었기 때문에 굳이 군대에 갈 필요가 없었지만,[* 하지만 당시 징병제는 유지되고 있었다. 물론 학업이나 취직등 다양한 이유로 징병을 손쉽게 피할 수 있었고, 처음부터 [[예비역]]으로 [[주 방위군]]이나 연방군에 지원해서 출퇴근 하며 짧은 군생활을 마치는 방법도 있었다(한국의 과거 [[방위병]]이나 [[상근예비역]]이 이 제도에서 기원한다). 지금 대다수의 청년들이 무조건 끌려가는 한국의 징병제랑은 결이 달랐다. 징병제가 다시 빡세진건 [[베트남 전쟁]] 이후다. 여튼 엘비스는 이미지 쇄신을 위해 징병검사에 응하게 되고, 기왕 군대 가는 김에 사병으로 가서 주독미군으로 자대배치를 받는다. 2년동안 일반 병사들과 똑같이 구르다 나왔다고 한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지 10여년밖에 안 되었고, 한국전쟁이 끝난지 얼마 안 되는 시점이었기 때문에, "나라를 위해 충성하는 착실한 젊은이"의 이미지를 얻기 위해 자진입대를 결정한 것이다. 엘비스가 나이가 들면 반항적인 느낌의 로큰롤 청춘스타라는 이미지만으로는 한계가 있을테니, 자진 입대를 통해 기성세대의 반감을 누그러뜨리고, 이후 보다 폭넓은 팬층에게 사랑을 받는 '국민가수'로 전환시키는게 장기적인 안목에서 꼭 필요하다는게 톰 파커의 판단이었다. 그리고 엘비스는 전역 후 60년대 내내 로큰롤 음악활동보다는 삼류 영화들에 자주 출연하며 배우 활동에 더욱 주력했고, 60년대 후반에 점프슈트를 입고 라스베가스에서 공연을 시작하면서 음악계에 컴백한다. 1959년 [[버디 홀리]]와 [[리치 발렌스]], [[빅 바퍼]]를 태운 비행기가 악천후로 인해 추락사고를 일으키게 되고, 이 세명의 젊은 로큰롤 뮤지션들 또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이날 신문을 읽고 한 소년이 충격을 받게 되는데, 이 소년은 훗날 뮤지션이 되어 이날의 충격을 곡으로 남긴다. 그 소년은 바로 [[돈 맥클린]]이었고 그 곡은 [[American Pie(노래)|아메리칸 파이]]였다. 가사 자체에도 "그날, 음악이 죽은 날"이라는 부분이 들어가 있다.][* 음악이 죽은 날이란 표현은 전혀 과장이 아니었다. 향년 22세였던 버디 홀리는 단 18개월의 활동만으로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들어갈 정도로 로큰롤과 락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단적으로 록밴드 표준 구성에서 색소폰과 건반을 치워버린 것도 버디 홀리의 더 크리켓츠가 최초이다. 그리고 영화 [[라 밤바]]로 잘 알려진 리치 발렌스의 향년은 만 18세였고, Chantilly Lace를 빅 히트 시킨 '빅 바퍼' J.P.리처드슨이 최연장자였는데 이 때 나이가 만 28세였다.][* 버디 홀리, 리치 발렌스, 빅 바퍼와 함께 겨울 댄스 파티 투어를 다니던 디온(가수)은 사고 비행기에 타지 않아 목숨을 건졌다. 이후 그는 프랭키 사르도와 당시 무명가수였던 바비 비와 함께 남은 2주간의 겨울 댄스 파티 투어를 다녀야 했다.] 1960년, 진 빈센트와 에디 코크란은 영국에서 투어를 돌고 있었다. 그들은 공항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탔는데, 그만 택시의 타이어가 터지는 바람에 교통사고를 일으키게 되고, 에디 코크란은 사망하고 진 빈센트는 평생 다리에 심각한 장애를 가지게 되고 다리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다량의 술과 약물을 복용하게 된다. 결국 이는 그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이러한 결과, 1961년부터 62년까지 [[Runaround Sue]], [[The Wanderer]], [[Lovers Who Wander]]를 연속으로 히트시킨 [[디온(가수)]] 만이 남게된다. 이때부터 로큰롤은 몇년간 깊은 잠에 빠진다. 대신 빌보드 차트에서는 로큰롤에게서 파생되긴 했지만 아예 가사가 없는 기교 중심의 [[서프]] 음악이 대중들을 사로잡기 위해 여러 사운드를 발전시켰고, 후에 나올 신세대 록 뮤지션들이 이에 영향을 받아 사이키델릭을 비롯한 여러 시도를 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또한, 60년대 초에 [[처비 체커]]의 The twist가 역사에 한획을 그으면서 트위스트 열풍이 불었다. 이 두가지가 로큰롤을 몇년간 붙들어 놓으며 완전히 한물간 장르가 되버리는 상황은 피할수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로큰롤은 그 본래의 정신과 활력을 잃고 수면 아래로 가라앉게 된다. 이렇게 로큰롤이 시들해지게 된 건, 위의 교통사고처럼 뜻하지 않은 사고의 탓도 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로큰롤 1세대인 기존 로큰롤 뮤지션들의 창작력이 고갈되고 더이상 새로운 음악적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아서 음악적으로 정체되어버린 상태였다는 점도 큰 원인이었다. 음악적으로 더이상 딱히 새로운게 안나오니 음악팬들도 차차 질려하며 흥미를 잃기 시작했고, 로큰롤 뮤지션들 스스로도 이젠 나올만 한건 다 나왔나 보다라며 로큰롤의 미래에 대한 확신과 열정을 잃어갔기 때문이었다. 어떤 분야든지 이런 답보적인 상황에서 벗어나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새로운 세대로의 교체 및 외부로부터 뭔가 신선한 바람이 유입되는게 필요하기 마련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