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루쉰 (문단 편집) === 학생 시절 === 근대 중국 사회가 서구 문명과의 접촉으로 근대화에 눈을 뜰 무렵, 집안의 몰락으로 정통적인 입신의 길이 막혀 버린 루쉰은 새로운 세계의 경험을 위해 무술변법(戊戌變法)이 나던 해인 1898년 그의 나이 17세 때 [[난징]](南京)으로 가 지역 탄광의 전망이 밝았기 때문에 징난 총독이 설립한 광산 및 철도학교(징난사관학교)로 전학했다. 그 광산은 결국 붕괴로 판명되었지만 학교는 계속 나아갔다. 이것은 루쉰가 서양 학문, 특히 과학에 처음 접촉한 것이었다. 그는 또한 [[독일어]]와 [[영어]]를 공부했다. 그는 수업 준비에 시간을 거의 들이지 않았고 보통 제일 먼저 끝마쳤다. 그는 여분의 시간을 손에 쥔 채, 자극을 받기 위해 학교 밖을 내다보았다. 그는 말을 빌려서 난징 외곽에 있는 공원을 돌아다니곤 했는데, 때로는 한족으로서 그는 저주와 조롱의 대상이 되곤 했는데, 이 곳에서 그는 전통적으로 좌파 학자들이 인종 민족주의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묘사해 왔다. 거기서 4년간 루쉰은 [[물리]], [[수학]] 등 근대 [[과학]]의 기초를 배우며 서양 과학의 우월성을 실감하게 된다. 또한 학교에서의 정규교육 외에 당시 중국의 식자들간에 널리 읽히고 있던 헉슬리의 《천연론(天演論)》(《진화와 논리》 번역)을 통해 진화론에 흥미를 느끼게 된다. 이 [[진화론]]에의 개안(開眼)은 루쉰의 정신적 성장에 큰 영향을 주었는데, 그것은 과거의 구습에 얽매여 있는 중국 민족의 낙후된 정신생활을 개선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다. 또 그는 [[량치차오]]의 개혁가 저널인 시우바오(Shiwu bao)와 토머스 헨리 헉슬리으의 진화와 윤리(Tiany un 假假假假)를 읽었고, 이 번역은 그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루쉰은 수오지(假假)라는 수필에서 이 책을 읽으며 시골 집에서 창 밖을 내다보며 헉슬리가 이 책을 쓴 경험을 회고한다. 그는 또한 린 슈의 소설 번역뿐만 아니라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도 읽었다. 후자 중에서, 그는 특히 영국의 노르만 통치에 대한 색슨족의 저항을 다룬 소설인 [[아이반호]]와 중국의 노예화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는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좋아했다. 또한 루쉰은 이 시기에 유신파(維新派)에 의해 간행되던 「시무보(時務報)」와 서구의 정치, 경제, 문화에 관한 것을 널리 소개했던 「역서강편(譯書江編)」 등을 통해 서구의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을 접하게 된다. 이 잡지는 1899년 [[일본]]에 유학중이던 학생들에 의해 편찬된 최초의 신잡지로, 주로 서구의 서적을 번역하여 실었다. 루쉰은 이 잡지를 통해 서구의 문학과 철학 서적을 처음으로 접하게 되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장 자크 루소]]의 《민약론(民約論)》,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의 《[[춘희]]》 등이었다고 한다. 루쉰은 1901년 말에 광로학당을 졸업하고 바로 다음 해인 21세 때, [[일본]]으로 정부 장학금을 받아 유학의 길을 떠나 [[도쿄]]의 일본 대학 진학을 준비하는 [[중국인]] 유학생을 위한 어학원 홍문(弘文)학원 속성과에 입학한다. 그는 그곳에서 중국인에 대한 일본인들의 증오심을 느꼈고, 일본에 있는 그의 동료 중국인들의 행동을 부끄러워했다. 그가 도쿄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의 좋은 친구이자 동료 쉬쇼우장(许寿裳)은 루쉰과 연을 끊었다. 그가 그렇게 하는 것을 상대적으로 꺼린 것은 중국 학생들을 감독하는 일이었던 청의 관리 야오원후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곳에 머무르는 2년 동안 루쉰은 [[일본어]]를 배우며 [[철학]]과 [[문학]]에 관한 책을 광범위하게 읽으며, 혁명집단인 '광복회(光復會)'에도 출입하게 된다. 이 때에 그는 '국민성'에 관한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면서 중국과 중국인을 구할 방법을 찾기 시작한다. 루쉰은 옌푸와 린슈를 계속 읽었지만, 란시퉁의 假假도 좋아했는데, 이것은 훗날 루쉰의 반유교사상에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르는 의례를 공격하는 책이다. 왕시칭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중요성을 과장한 우지휘 같은 [[아나키스트]]들에게 혐오감을 느꼈다고 한다. 또한 그의 길고 다작적인 번역가로서의 경력이 시작됐는데 첫번째 작품은 [[빅토르 위고]]의 아내에 의한 짧은 전기적인 작품에서 시작되었다. 위고는 댄디를 구타한 죄로 수감될 젊은 여성을 구했다. 그리고 그는 일본판 [[쥘 베른]]의 Journey to the Moon을 번역했다. 번역 서문에서, 루쉰은 그가 오락이라는 미명하에 뒷문으로 소설 현대 과학을 소개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또한 저장차오를 위해 보이저의 일부를 지구의 중심부로 번역한다. 민족적 성격(人國的假)의 담론이 이 번역본에 들어왔고, 어느 순간 그는 리덴브록의 입에 다음과 같은 말을 넣는다: "이 겁쟁이들아, 너는 마치 부틀릭을 전공하는 중국 학생들 같다." (원문에 등장하지 않은 대사) 이 시기에 출판된 『중궈디즈힐루룬』(중국 지질학의 간략한 개요)도 지질학(땅과 영토)과 애국심(중국은 중국의 영토)이 혼재하고 있다. 외국인들은 중국을 공부하는 것은 허용되지만, 그녀를 탐험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그들은 그녀를 존경할 수는 있지만 탐낼 수는 없습니다." 그 에세이는 에른스트 해켈의 글에 크게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 결과 일본의 유신(維新)이 서양의 [[의학]]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인식하고, 1904년 가을 [[도쿄]]를 떠나 현재의 [[도호쿠대학]]인 센다이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한다. 당시 루쉰은 그 학교에 중국에서 유학한 유일한 중국인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현지 신문들이 그의 도착을 알리는 가운데, 매우 대중적인 환영을 받는다. 학교에 다니던 중 루쉰은 어느 날 수업 시간에 일본인 교수가 틀어준 뉴스 필름 속에서, [[일본군]]에게 처형당하는 중국인 포로를 넋 놓고 바라보는 동포의 모습을 보고 충격받았다. 루쉰은 그 장면을 보고서 ‘중국인은 [[구경꾼]]’이라는 정의를 얻었다. 구경꾼은 자기 앞에서 벌어지는 역사적 사건에 거리를 둔 채, 수동적이고 몰자각적이 된다. 루쉰은 자기 민족의 구경꾼 의식을 흔들어 깨우고자 육체를 고치는 의사가 되기보다 작가가 되는 것으로 목표를 바꾸었다. 루쉰 연구자들은 저 일화를 ‘환등 사건’이라고 부르는데, 그의 소설과 에세이에는 중국인의 구경꾼 의식을 질타하는 장면과 논설이 번번이 등장한다. >그 당시에, 저는 오랫동안 제 동료 중국인들을 보지 못했는데, 어느 날 그들 중 일부가 미끄럼틀에 나타났습니다. 한 사람은, 두 손을 뒤로 묶은 채, 사진 가운데에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의 주위에 모여 있었다. 신체적으로,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물을 수 있는 만큼 강하고 건강했지만, 그들의 표정은 그들이 영적으로 굳어지고 무감각하다는 것을 너무나 분명하게 드러냈습니다. 이 영상에 따르면, 손이 묶인 중국인들은 러시아인들을 위해 일본 군대를 감시해습니다. 그는 '공적인 예'로서 목이 잘렸습니다. 그의 주변에 모인 다른 중국인들은 그 광경을 즐기러 온 것이었습니다. 많은 평자들에 의하면 이 사건은 그가 "영적 변혁을 일으키기 위한 최선의 방법 (혹은 그 당시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문학 및 예술을 통한 것"으로 깨닫게 되었고 의학 공부를 포기하고 문학을 추구하게 했다. 이 사건은 루쉰 연구에서 루쉰의 지적 발달에 있어 중요한 순간으로 간주했다. 재학 중 루쉰은 의학에 관한 전문적 지식의 습득 외에도 정치 모임에 자주 참가하면서 더한층 정치적 의식을 심화시켜 나가며, 서서히 문학의 길로 다가가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유명한 '환등(幻燈)사건'으로 인해 루쉰은 [[의학]]에서 문학으로 방향전환을 하게 된다. 이 환등사건에 관한 일화와 그 충격으로 인한 문학에의 결심은 루쉰의 첫 작품집인 《(납함)의 자서(自序))에서 그 일면을 잘 엿볼 수 있다. 루쉰은 환등 사건으로 인해 중국과 같은 낙후된 국민에게는 건강한 체격보다 강한 국민정신이 더 필요하다고 통감한다. 그래서 국민정신을 개조하는 데 문예를 통한 방법이 최선이라고 판단하고 문예운동에 매진할 것을 결심한다. 그리고 그 최초의 작업으로 루쉰은 동인 잡지 발간을 계획한다. 1907년 루쉰은 [[도쿄]]에 있던 몇 명의 동료들과 의기투합해 「신생(新生)」이라는 문예잡지의 출판을 계획한다. 그러나 이 20대의 젊은 중국 유학생들의 의욕과 패기는 인력과 재력의 부족이라는 현실의 벽에 부딪혀 무산되고 만다. 루쉰은 이 문학활동의 실패로 심한 좌절감을 느끼게 되지만 곧 극복하고 <마라시역설(摩羅詩力說)>, <문화편지론(文化偏至論)> 등의 논문과 몇 편의 [[러시아]] 문학 작품을 번역하여 자신의 문학생활의 첫장을 열게 된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08년 루쉰은 혁명적 논객인 장병린(章炳麟)의 《설문해자(說文解字)》의 강의를 듣게 된다. 손문, 황흥과 함께 [[신해혁명]]의 삼종(三宗)이라 일컬어지는 장병린은 국학자로서의 성망도 있고 해서 당시 혁명 운동에 대한 영향력은 지식인과 학생들 간에 손문 이상으로 컸다. 루쉰은 동생인 주작인(周作人), 허수상(許壽裳), 전현동(錢玄同)과 함께 학자로서의 장병린에게 접촉한 셈인데 '전투적인 문자이야말로 선생의 생애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영구적인 업적'이라고 <태염선생(太炎先生-장병린)에 대해서>에서 말할 정도로 그 감화는 지대했다. 루쉰은 장병린과 사귀면서 그들 조직인 '광복회'에도 자주 출입하게 되는데 그 가입 여부는 관해서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이처럼 8년여에 걸친 유학시절은 루쉰의 최초의 문학활동 시기였으며, 초기 사상의 중요한 형성시기였다. >거의 유산에 얽매이지 않는 오늘날의 성과는 없기 때문에, 문명은 정기적으로 과거의 큰 흐름을 바꾸거나 때로는 저항해야 하며, 따라서 때때로 그것은 비정상적인 발전을 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정말로 현재에 대한 계획을 채택하고 싶다면, 우리는 이미 지나간 것을 연구하고 미래를 내다보고, 물질을 공격하고, 영적인 것을 개방하고, 개인에게 자유를 주고, 대다수를 거부해야 한다. 만약 사람들이 도덕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스스로를 발전시킨다면, 이것은 국가들을 낳게 한다. 나뭇가지를 잡고 잎을 따고 경제, 무기, 의회, 헌법을 장려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 정신없이 자신의 마음속에 권력과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옳고 그름을 분명히 구별할 수 없다. 그들의 행동과 제안은 모두 부적절할 것이다. 게다가, 의도가 비열하지만 새로운 문명의 이름에 합당한 사람들은, 어떻게 그들은 자신의 욕망과 이익을 추구하지 않을 수 있을까?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