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루쉰 (문단 편집) === 정치, 작가 활동 === 1909년 루쉰은 귀국해서 [[항주]](杭州)의 양급사범학교에서 [[화학]]과 [[생리학]]을 가르치다가, 이듬해인 1910년 여름에 고향인 소흥으로 돌아와서 소흥 중학교에서 근무하게 된다. 1911년 이른바 신해혁명이 폭발하고 루쉰은 소흥사범학교 교장에 취임하여 재직하던 중, 다음해인 1912년 [[난징]]에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교육총장이 된 채원배(蔡元培)의 요청에 따라 교육부원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임시정부를 따라 [[베이징]]으로 이주한다. 그러나 루쉰은 기대를 걸었던 [[신해혁명]]이 역사적 임무를 완성하지 못하고 [[위안스카이]](遠世凱)의 제정부활운동, [[장쉰]]의 [[복벽]](複壁)사건 등을 통해 다시 [[복고주의]]적 경향으로 흐르자 크게 실망한다. 1912년에서 <광인일기>를 발표하게 되는 1918년까지는 루쉰의 생애를 통해 사상적으로 가장 고난에 빠진 시기로 새로운 출구를 찾기 위한 사고와 심사의 시기였다. 그는 중국사회와 사상에 관해 깊이 관찰하고, 중국의 역사와 전통문화에 관한 연구에 몰두하며 중국서적에 관한 고증과 수집, 금석비첩(金石碑帖)과 [[불경]]의 연구 등에 몰두하며 시간을 보내게 된다. 신해혁명의 붕괴로 심한 혼란에 빠진 루쉰은 새로운 중국 혁명상의 재건을 고대하며 절망과 침묵의 시기를 지나고 있었던 것이다. 루쉰에게 있어 청년기의 반항 없는 문학활동의 실패와 그 뒤를 이은 어두운 조국의 현실은 심한 정신적 방황과 고뇌를 가져 왔던 것이며, 따라서 이러한 내면의 혼란을 극복하고 나아가 다시금 자신이 속한 세계와의 사이에 일정한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단호한 윤리적, 의지적인 자아를 확립하기 위한 정신적 여유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방황과 고뇌를 뚫고 나온 작품이 바로 루쉰의 첫 작품이자, [[백화문]] 문장으로 씌어진 중국 최초의 신소설인 <광인일기>였던 것이다. 중국문학이 비록 수천 년의 장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으나, 소설은 다른 장르에 비해 줄곧 경시되어 왔다. [[명나라]]와 [[청나라]]에 백화소설(구어체로 된 소설)이 많기는 하나 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하나같이 창조정신이 결여되었고 새로운 사상도 없이 묘사하는 [[신변잡기]]식 이야기였다. 따라서 진정한 신소설은 신문학운동 이후 20세기가 시작되면서 새로운 시대를 맞는다. 당시 중국인들에게 깊은 자극을 준 것은 번역을 통한 서양사상과 문학의 영향이었다. [[청일전쟁]] 후 변법운동(變法運動)이 대두했던 때에 한편으로는 유럽의 사상과 문학이 중국에 소개되기 시작했다. 서양서적의 변역은 그 전부터도 있었지만 종래의 그것은 양무(洋務)운동이나 [[기독교]]의 전도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많았고 선택의 범위가 제한되었는데, 이 무렵에 와서는 사상과 문학의 분야까지 넓혀졌던 것이다. 양계초(梁啓超), 엄기도(嚴幾道-嚴復), 임서(林緖), 진독수(陳獨秀), 호적(胡適), 주작인 등은 문학, 사상의 개혁을 주장하며 서양의 문화를 소개하는데 앞장섰다. 당시 이들의 문학혁명과 문체개혁, 서구문학의 번역소개는 새 세대들에게 문학에 흥미를 갖게 했으며, 중국 신문학의 부흥에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중국인들로 하여금 서양문학의 특성을 새삼 인식케 하였다. 이로 인하여 중국 지식인들 머릿속에 수입된 합리주의 사상은 중국의 전통적인 봉건사상과 유교사상을 근본적으로 뒤엎어 놓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문학개혁에 관한 의기당당한 거센 물결은 곧 [[5.4운동]]의 고조를 맞이하면서 전국을 석권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작품을 통한 현대문학의 기원이 된 것은 루쉰의 소설들이었고 특히, 백화로 씌어진 소설로 1918년 「신청년」지에 발표되었던 <광인일기>였다. 루쉰은 이 백화체의 문장으로 씌어진 새로운 구성의 소설을 통하여 '사람이 사람을 잡아 먹어온' 중국의 봉건사회를 고발하였으며, 또한 중국의 장래를 위하여 '너희들, 지금 곧 개심하라. 진심으로 개심하라. 알겠는가. 머지않아 인간을 먹는 인간은 이 세상에 있을 수 없게 된단 말이다.'라고 외쳤던 것이다. 이 뒤에 전국적으로 백화의 신문과 정기 간행물이 출현하였으며, 이에 중국의 오래 전통문학은 종말을 고하고 새로이 현대문학이 그 넓은 자리를 대신 차지하게 된 것이다. 루쉰의 <광인일기>는 당시 신문화운동을 주도하던 진영으로부터의 봉건사회에 대한 최초의 도전서였으며 사상혁명과 문학혁명의 이정표 역할을 했던 중요한 작품이다. 루쉰의 작품 중 가장 현실에 대한 고발성이 강하게 나타나 있으며, 내용과 형식의 과감한 파격성으로 인해 중국의 젊은 지식인 세대에 큰 충격을 주었던 작품이다. 작품은 13개 부분으로 이루어진 일기체 형식이다. 흘인(吃人 - 먹는 사람, 즉 박해자)과 피흘인(먹히는 사람, 즉 피박해자)가 선명하게 대조를 이루며 예교(禮敎)가 사람을 잡아 먹는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 이 작품의 특징이다. 피해망상자의 형상을 통해서 중국의 [[유교]]적 전통사회내의 가족제도와 예교의 폐단과 피해를 과감하게 폭로하고 있다. <광인일기>는 어느 날 밤 달을 보고 '이제까지 30년 이상이나 전혀 제 정신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광인의 이상심리, 다시 말해 유교이념의 강력한 조직에 묶인 정상인들과 달리 광인 혼자서 각성하여 괴리감을 느끼면서도 암흑 속에 있는 중국사회 전체를 고발한 작품이다. 광인의 눈에 비친 사회는 모든 인간들이 '자신은 남을 잡아먹으려고 하면서 남에게는 잡아먹히지 않으려 하므로 서로 의심을 품고 흘끗흘끗 상대방을 감시하고 있는' 세계이다. 광인은 4천년에 걸친 중국 봉건사회의 역사책 속에서 '식인(食人)'이라는 두 글자를 발견하고[* 본문에서 어차피 동네 사람들 모두에게 무시당하는 입장이라 집에 틀어박혀서 할 일도 없으니 시간이나 때워야겠다 하고 역사책을 들여다본 건데, 인의니 도덕이니 하는 [[타락|삐뚤빼뚤한]] 글자 한두개를 제외하면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내용만 가득했다'''는 끔찍한 사실을 발견하고 만다.] 그나마 친족인 형부터 개심시키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귀신같이 알고 찾아온 동네 사람들이 난리를 피우는 바람에 광인은 어딘가로 끌려가 감금되고, 그 와중에 광인은 "형이 집안을 물려받았을 때 누이동생이 죽었는데, 어쩌면 그 때 나도 누이동생을 [[착취|'잡아먹은']] 게 아닐까?"라는 [[동족혐오]]와 [[죄책감]]이 섞인 깨달음을 얻는다. 하지만 광인은 '하지만 인간을 잡아먹은 적이 없는 아이가 아직 있을지도 모른다. 그 아이들을 구하라!'라고 마지막까지 호소하며 글을 마친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Lu_Xun3.jpg|width=100%]]}}} || 즉, 일본 유학시절 진화론과 [[프리드리히 니체]], [[조지 고든 바이런]] 등을 통해서 접한 서구 근대정신사조의 영향으로 홀로 각성하여 개혁의 의지를 품고 스스로가 '팔을 힘차게 흔들며 한 번 외쳐서 이에 응답하는 사람이 구름처럼 몰려들게 할 수 있는' 정신계의 전사라는 임무를 떠맡아 문예활동을 시도하였으나 모두 헛되이 실패로 끝나고 만다. 더욱이 자신이 무한한 열의를 가지고 지지하였던 [[신해혁명]]조차도 무력하게 [[위안스카이]]와 다른 군벌들 등의 반동세력에 의해 좌절되는 것을 보고 깊은 절망 속에 빠져서 탁본(拓本)의 수집이나 연구 등에 파묻히며 스스로를 마비시켜왔던 작가 자신이, 광인처럼 비슷한 체험을 통해 '잡아먹힌다'는 피해의식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그리고 결국 자신이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로 속해 있는 중국사회의 도피할 길 없는 암흑의 구조를 파악하게 됨으로써 문학자로서의 자각을 얻어 '아이들을 구해라.'고 하는 절망의 부르짖음을 발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현실정치에서 소외되어 있던 이상적, 관념적인 반항과 행동의 정신계의 전사는 그처럼 자신을 시대의 저변에 편입시키는 근원적인 선택에 의해 다시금 실재하는 중국민족과 밀착된 정치적 인간으로서의 현실참여적인 문학자이자 청년층을 적극 지지하는[* 본문 앞뒤에서 언급한 광인일기의 줄거리나 [[신해혁명]]의 애매한 마무리에서 보듯이 루쉰은 닳고닳아서 노회해진 어른들이 혁명을 이루기는 무리라고 판단하고 청년들에게 그 기회를 넘기려고 한 것이다.] 혁명투사로 탄생하게 된다. 이로부터 이어지는 루쉰은 자신의 창작을 통해 중국사회의 엄연히 가로놓여 있는 절망의 소재에 대한 현장 검증에 헌신한다. 중국의 현상에 뿌리깊은 절망감을 느꼈던 루쉰은 '문학혁명' 에 대한 열정으로 다시 붓을 들게 되고, <광인일기>를 시작으로 계속해서 '인생을 위한', '인생을 개선하기 위한' 작품을 발표한다. 루쉰은 1918년 <광인일기>로부터 1925년의 <이혼>에 이르는 8년여 동안 많은 소설을 발표하는데, 이 일련의 작품들은, 비평적 선도에 의해 열려진 문학 혁명 이념을 작품상에 나타낸 최초의 작품군이었다. 이 작품들은 시기별로 각각 창작집인 《납함( 喊)》(1923)과 《방황(彷徨)》(1926)에 수록되는데 특히, 첫 창작 소설집인 《납함》(싸움터에서 양쪽 병사들이 지르는 소리, 함성)에 실린 작품들은 문학전사로서의 루쉰은 투철한 비판정신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다. 구지식인의 몰락과 나태한 근성을 지적하여 경향심을 불러일으켰던 <공을기(孔乙己, 쿵이지)>(1919), 미신과 무지로 인한 중국인의 병폐를 일깨워 준 <약>(1919)과 <명천>, 농촌생활의 암담함과 피폐함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고향>(1921) 등의 시대 고발적인 일련의 작품들은 문학혁명가로서의 루쉰의 열정을 대중에게 알리며, 문학인으로서의 루쉰의 위치를 확고하게 해 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루쉰은 이름을 중국 근대문학의 선구자로서 후세에까지 길이 남을 수 있게 해 준 작품은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아Q정전]](阿Q正傳)>일 것이다. <[[아Q정전]]>은 1921년 12월에서 다음해 2월에 걸쳐 주간 「신보부간(晨報副刊)」에 파인(巴人)이라는 필명으로 발표된 중편소설이다. 이 소설은 각국어로 번역되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루쉰의 이름을 [[불후]]한 것으로 만든 대표작이다. <아Q정전>은 [[신해혁명]] 시기의 농촌생활을 제재로 하여 이 시기의 중국 농촌 생활상을 심각하게 파헤쳐 아Q라는 품팔이꾼의 운명을 비극적으로 묘사함과 동시에 중국민족의 나쁜 근성을 지적하여 국민성을 각성시키려 하고 있다. 이 소설에서 루쉰은 [[중국]]과 중국민족을 절망적으로 그리고 있다. 민족이 나아가야 할 길을 예견하고, 희망이 있는 방향을 제시하기보다는, 오히려 궁지에 몰려 소외되고 탈락되고 짓눌린 자의 모습을 집요하게 그려낸 것이다. 아Q는 반식민지, 반봉건적인 사회, 더구나 [[신해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가지 못하는 타성의 사회에서 사명감도 목적의식도 없으면서 부질없이 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드디어는 무기력하고 비겁한 노예근성으로 돌아가 그 최후를 공허하게 끝마치는 하나의 사회적 산물이다. 아Q의 성격은 풍부하고 다양하며 다혈질이다. 그는 자손심이 매우 강할 뿐만 아니라 보수적이며 우매무지하다. 그러나 아Q의 성격을 관통하는 지배적인 관념의 흐름은 '[[정신승리]]법'이다. 루쉰이 아Q를 통하여 예술상의 '정신승리법'을 끌어 낸 것은 심각한 현실적 의의와 깊은 역사적 의의를 내포하고 있다. 즉, 공허한 영웅주의와 무력한 패배주의에 침식되어 자국의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며 자기만족에 젖어 있고, 타개치 못하는 민족적 위기에 살면서도 대국의식을 버리지 못하고, 물질생활의 군데군데마다 실패를 경험하면서도 정신적인 만족에 현실을 외면해 버리는 청나라 정부와 한(漢)민족에 대한 조소와 비난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아편전쟁]] 이후 중국의 문호를 개방한 [[청나라]] 정부는 그들의 실패를 변명하고 감추면서 조정의 위엄을 계속 유지, 봉건 통치를 완고히 함으로써 허영과 거만한 욕구를 채운다. 이러한 상류사회의 기풍이 반봉건성, 반식민지의 중국사회에 만연되어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즉, 실제는 모든 것에 패하였으면서도 정신적인 승리에 만족하는 기풍이 하나의 국민성으로 인정되었고, 이러한 국민성에 대한 것을 루쉰은 철저하게 증오하게 된 나머지, 아Q라는 인물을 내세워 심히 채찍질을 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