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덩후이 (문단 편집) ==== 1기: 계임총통(1988년 - 1990년) ==== [[파일:F18.jpg]] (1988년 1월. 장징궈의 사망 직후, 계임총통으로서 취임 선서를 하는 리덩후이) 장징궈는 일관되게 자신의 후계가 [[대만 헌법|헌법]]에 따라 결정될 것이라고만 언급했을 뿐 후계자를 키우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그 상황에서 1988년에 장징궈가 죽자, 헌법에 따라 리덩후이가 계임총통이 되고 국민당 주석 대행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본성인]]으로 국민당 내에서 비주류에 속했으며, [[하오보춘]] 등의 국민당 보수파의 견제를 받았다. 예를 들면 장징궈가 [[장제스]] 사후 바로 국민당 주석 자리까지 물려받은 반면 리덩후이는 꽤 오랫동안 주석 대행에 머물러 있었다. 보수파들은 그를 [[옌자간]]처럼 얼굴마담으로 두고 장징궈의 잔여임기만 수행시키려 했다. 리덩후이는 [[외성인]] 위주의 보수파와 타협을 시도했고, 보수파이지만 리덩후이에 유화적이었던 [[쑹추위]] 등의 도움을 얻어 장징궈 사후 6개월 만에 주석이 될 수 있었다. 리덩후이는 이 때 국민당 중앙위원회 31명 중 16명을 본성인으로 기용하는 파격을 보여줬지만, 본격적인 개혁을 하지는 못하고 언론자유화, 야당 합법화 등 미미한 개혁만을 시행했다. [[정난룽]]이 분신한 것도 이 무렵의 일. 한편 1980년대 후반에 대만에 민주화 바람과 함께 노동 운동이 격화되고 있었는데 리덩후이 정부에서 반공을 이유로 강하게 찍어내렸다. 그래서 현재까지도 대만 내 노동 운동가에게 욕을 좀 얻어먹기도 한다. 리덩후이는 자신의 파벌을 키워 보수파의 견제를 억제하는 데 성공했다. 1990년 총통 임기가 만료되고 [[국민대회]]에서 선출되는 간선제 총통 선거가 실시되었다. 이 때에 이르면 국민당 내 리덩후이의 세력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 보수파들은 리덩후이가 국민당 총통 후보가 되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그 대신 부총통 후보만큼은 보수파의 인물을 내세우려 했지만, 리덩후이는 이를 무시하고 자신의 파벌의 인물인 리위안추(李元簇)를 부총통 후보로 세운다. 보수파들은 이에 반발해 [[린양강]](林洋港)을 총통으로, [[장웨이궈]]를 부총통 후보로 세우려 했지만 리덩후이가 인기스타 [[쑹추위]]를 앞세워 이를 진압함으로써 실패했다. 그리고 간선제 총통 선거에서 무사히 당선되었다. 이후 대만 야권의 반대를 무릅쓰고 보수파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하오보춘]]을 신임 행정원장에 임명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