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스쩡 (문단 편집) === 초기 활동 === 1882년 직예성 고양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청나라 군기대신을 지낸 이홍조였다. 1900년 [[의화단 운동]]이 벌어지자 피난을 떠났다가 팔국 연합군에게 의화단이 진압된 후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1902년, 주불 청나라 공사 [[쑨바오치]]를 따라 프랑스에 유학하였다. 3년간 농업을 공부한 후 [[소르본 대학교]] 산하 파스퇴르 연구소에 들어가서 생물학을 연구했다. 이때 콩에 관해 연구한 사실에 대해 프랑스어로 여러 논문을 내놓았는데 이는 중국인이 최초로 프랑스어로 논문을 낸 사례였다. 프랑스 유학 중에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나 사회진화론 특유의 적자생존 논리에 거부감을 느껴 이를 보완하기 위해 무정부주의를 탐구하였다. 이후 [[표트르 크로포트킨]]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청나라 체제에 불만을 품게 되었고 1906년 8월, [[장런제]]의 소개로 파리에서 중국 동맹회에 가입했다. 이때 동맹회 규약이 자유의지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비판하고 하늘에 대고 맹세하는 것에 대해 단순한 물질에 불과한 하늘에 어찌 맹세를 하느냐고 했지만 장런제가 쑨원에게 양해를 구해 서약 없이 동맹회에 가입하게 되었다. 1907년 여름, [[장런제]], [[우징헝]] 등과 함께 <신세기 그룹>을 조직하여 1910년 5월 21일 정간호를 낼때까지 무정부주의를 선전했으며 [[미하일 바쿠닌]], [[표트르 크로포트킨]]의 주장을 소개하였다. 이때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을 번역하여 중국에 소개하였고 중국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11년 [[신해혁명]]이 벌어지자 귀국하여 혁명에 참여, 1911년 톈진에서 경진동맹회(京津同盟會)를 조직하여 종사당을 상대로 한 테러를 사주했으며 1912년 2월, 남북화의가 어느 정도 무르익자 [[왕징웨이]], [[장쥐]], 오경항과 함께 베이징에서 진덕회를 조직, <민의보(民意報)>를 발간하여 혁명에 참여하였다. 리스쩡은 중국의 롤모델을 자신이 유학한 프랑스로 보았기 때문에 1912년 오경항과 함께 베이징에서 유법검학회(留法儉學會)를 창립하여 중국 청년들이 프랑스로 근공검학 유학을 가는 것을 지원하였다. 경진동맹회 활동 중 종사당을 비롯하여 청조 복벽파에 대한 테러를 사주하였으며 1912년 임시대총통 [[쑨원]]으로부터 프랑스 공사직을 제안받았으나 무관주의를 내세워 거절했다. 이후 상하이로 이동하여 <세계사>를 조직, 근공검학 운동을 지원하였다. 이때 일본에서 활동하던 아나키스트 [[장쥐]]가 참의원 원장이 되자 이를 두고 아나키스트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는데 리스쩡은 장쥐가 정치에 지나치게 몰입하여 타락했다고 불만스러워하면서도 공격도 옹호도 하지 않고 조정자의 입장을 맡아 다른 아나키스트들의 칭송을 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