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영희 (문단 편집) == 논란 ==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냉전기에 '''사상의 은사'''인 그의 역할은 인정하나, 과오도 상당히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과거 [[마오이즘|마오이스트]]를 자처했다가 [[뉴라이트(대한민국)|뉴라이트]]로 전향한 안병직 교수 등이 그를 적극적으로 비판하며 시장주의를 강력히 옹호하였다. 극단론자들은 '의식화의 원흉'이라고까지 그를 맹비난한다. 그리고, 반박 항목들을 보면, 단편적인 정보를 바탕으로 어떤 진단을 내려서인지 뭔가 성급하고 미래에 대한 혜안이 좀 부족해 보인다는 느낌 역시 지울 수 없다는 입장이 있고 현대에 있어 리영희가 비판받는 가장 큰 이유가 미래 예측이나 사안에 대한 전반적인 분석의 부정확함 때문인 것은 분명하다. '문화대혁명 옹호'의 경우, 본인이 접할 수 있었던 정보에도 불구하고 명백한 문제점을 회피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리영희의 가장 큰 과오로 지적된다. 단, 문화대혁명의 전모와 실체에 대한 증거들이 객관적으로 공론화되고 거의 합의가 완료되기 이전, 당시 접할 수 있던 정보를 선택적으로 취합해야 했다는 당시 시점은 고려될 필요가 있다.[* 문화대혁명의 권위자인 중앙대학교 백승욱 교수도 40~50년 전에 쓰인 리영희의 글을 가지고 이게 틀렸네 저게 틀렸네 21세기에 편하게 품평하는 것부터가 무의미한 일이라고 평가한다.] 리영희의 《8억인과의 대화》가 쓰여진 것은 1977년이므로 21세기의 공감대를 기반으로 감정적으로 판단하기는 어렵다. 또한, 당시(70년대 후반~80년대 초반)에 국내에서 문화대혁명에 대해 진행된 분석이 별로 없었다는 점도 옹호여론을 뒷받침한다. 리영희 스스로도 인정했던 자신의 문제점이 있다면, 다소 몽상적이기까지 한 인간주의와 정신론의 신봉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그는 물질에 대해서 극도로 적대적이었으며 서방 자본주의 체제는 물론이고 스탈린의 소련조차도 산업화를 해서 관료제 부패 사회가 된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리고 산업화된 비인간적이고 비양심적인 사회에 대한 대척점으로 정신주의적이고 인간주의적인 유토피아에 가까운 어떤 사회를 제시했는데, 문제는 그 대안으로 갖다놓았던 것이 문혁 하의 중국이라서 나중에 엄청 욕먹은 것이다. 그리고 그 인간주의적이란 사회가 혁명을 위해 사람들을 때려죽이고 문화유산을 파괴하고 수령의 가오를 위해서 지진으로 수십만 깔려죽는 것도 아랑곳않는 사실상 비양심적 체제였다는 것이 드러난 후 히틀러랑 다를바 없었다는 것으로 입장을 전환하며 물질과 정신이 조화되어야 한다고 새로운 견해를 제시했다. 하지만 정신론에 대한 집착은 말년에도 어느 정도까진 남아서 북한을 수천만명의 인민들의 자주성을 박탈하는 수령제 독재로 비난하면서도[* 김씨 일가 독재에 대해서 리영희는 매우 부정적이었으며, 김일성 역시 히틀러에 견주었다. 그리고 현실 사회주의 체제는 실패했다고 분명히 단정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소련의 붕괴가 사회주의 실패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주장에 대해 80년간 사회주의 실험한 사람들이 안된다고 하는데 서울에서 책 몇권 읽고 된다고 하는 주장이 얼마나 비과학적이냐고 깠으며 고르바초프에 대해서도 3류 사상가라는 비난에 맞서 훌륭한 사람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부정부패가 없고 민족 정통성을 가진 나라라서 남한이 배워야 한다고 평가하는 등 몽상적인 면모도 여전히 보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