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영희 (문단 편집) === 문화대혁명 및 중국공산당 미화 문제 === >"문화대혁명이라는 급격하고 웅장한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러한 사실은 미국 기자들만 모를 뿐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진 지 오래다." >"이러한 문화혁명의 과정이 무시무시한 내부 숙청이 아니라 이론정립과 토론, 자기비판, 설득 등 매우 인간적인 방법으로 진행되었다." 리영희 교수는 [[마오쩌둥]]과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자신의 저서에서 지나치게 미화하였다. 대표작 《[[전환시대의 논리]]》 《8억 인과의 대화》(약칭 대화, [[1977년]] 작)[* 중국의 당시 인구를 말한 것으로 일종의. 편역서이다. 후에 [[1983년]]에는 《10억인의 나라》라는 책을 다시 냈다.]에서 리영희는 문화대혁명을 '이 때까지의 자본과 물질 중심의 세계에서 인간의 본성을 들여다보려는 세계관으로의 전환'이라고 하거나 '물질주의에서 정신적 실존적 인간의 본연을 고민하는 단계로 세계가 변화한다'는 식으로 표현했다. 또한 마오이즘을 일종의 인민주의로 묘사하기도 했다. 이는 [[유물론]]적 서구 세계관이 일상 생활이나 정신적인 부분은 개혁이 시도되지 않았음을 들어 이야기 한 것이다. 리영희 문혁관 자체가 리영희 특유의 인간주의, 정신론에 대한 과도한 신념을 기반으로 한 몽상이 많았는데 그 마지막 단계가 탕산 대지진 칭송이었다. [[1976년 탕산 대지진]]과 뉴욕정전 사태를 비교하며 ‘탐욕에 물들어 약탈이나 하는 미국인들보다 중공 시민들의 시민수준이 높다’면서 사회주의와 마오쩌둥 문혁 체제의 우수성이라고 칭송했다. 자본주의의 ‘미개함’을 비교하며 '인간주의'를 앞세운 마오쩌둥 체제가 우월하다고 하는 한편, 문혁 체제가 20년은 더 갈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을 추진하자 서구의 공산주의 및 사민주의 지식인들처럼 그가 자본주의의 길을 걷고 있다고 격렬히 비난하였다. 무엇보다 독재정권에 맞서 진실을 파헤치겠다던 소위 '지식인'이라는 사람이, 중국에서 대학살이 벌어지고 있던 시절 중국 독재정권의 문화대혁명 미화 선전을 아무 의심 없이 그대로 믿어 버리고 잘못된 정보를 대중에게 전파한 것은 분명 비판 받을 만한 부분이다. 불과 3년 뒤인 1980년, 같은 조선일보 출신인 [[조갑제]] 기자가 5.18 당시 목숨 걸고 광주로 들어가 당시 전두환 신군부가 주장한 북한군 침투설이 사실이 아니라고 밝혀낸 것과 심히 비교되는 일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