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산고등학교 (문단 편집) == 학교 연혁 == || '''날짜''' || '''연혁''' || ||1936. 03. 16. ||마산공립중학교 설립인가(5년제, 10학급)|| ||1936. 04. 11. ||개교|| ||1950. 06. 15. ||고등학교령에 의거 수업연한 3년제로 개편|| ||1951. 09. 01. ||학제 변경에 따라 마산중학교와 분리(15학급 인가)|| ||1974. 12. 31. ||마산고등학교부설방송통신고등학교 설치 인가|| ||1994. 09. 10. ||강당 겸 체육관 개축 준공(연건평 718평)|| ||2002. 07. 18. ||본관 개축 준공(2,954평)|| ||2003. 04. 12. ||관정교육관 제2관 준공|| ||2004. 04. 08. ||역사관 개관|| ||2007. 02. 26. ||실내야구훈련장 준공(494.1m^^2^^)|| ||2015. 10. 17. ||학명관(기숙사)개관|| ||2017. 02. 07. ||제34대 문정식 교장 취임|| ||2021. 03. 01. ||제35대 임채환 교장 취임|| ||2021. 12. 29. ||제81회 졸업식(졸업생 180명, 총 33,872명)|| ||2022. 03. 02. ||2022학년도 입학식(입학생 160명)|| 마산고등학교 홈페이지에 기재된 연혁이다. 마산고등학교의 초기 설립과정은 옛 마산지역의 근대 향토교육사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일제강점기]] 마산부 지역에는 구한말 개항 이래 도시가 성장하며 인구가 모여들었고, 자연히 여러 교육기관이 생겼다. 구체적으로는 구한말 시절 이미 마산공립보통학교(현 성호초등학교)가 생겼고, 일제에 강제병합된 이후에도 마산노동야학교[* 이 학교의 자금줄이자 [[독립운동]] 자금의 출처였던 원동무역의 창업자 옥기환 씨는 해방 후 첫 마산시장을 역임했다.](현 중앙중/마산공고), 창신학교(현 창신중/창신고), 호신학교(창신학교의 고등부가 분리, 이후 폐교), 의신여학교(현 의신여중), 마산공립상업학교(이후 마산동중/마산상고(현 [[마산용마고등학교|용마고]]), 마산공립고등여학교(현 마산여중/[[마산여자고등학교|마산여고]]), 성지여학교(현 성지여중/[[성지여고]]) 등의 공립/사립 교육기관이 존재했고, 이외에도 일본인들이 다니던 학교인 마산공립심상고등소학교(현 월영초등학교)가 있었다. 그러나 [[대학예과]], [[제국대학]] 항목에서 보듯 식민지 조선의 인재가 고등교육을 받기 위한 과정은 제도적으로 막혀있다시피했고, 이들 학교의 학력도 인정되지 않았다. 당장 일본 본토의 대학에서는 이들 학교의 교육이수를 '중졸', 아니 그 이하로 대우해주고 있었고 학제에 따라서는 아예 계산하지 않는 곳도 많았다. 그리하여 식민지 조선에서는 소위 '[[민립대학설립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으며[* 다만 경성제국대학의 경우 민립대학운동 이전부터 설치계획 자체는 있었다고 한다.], 마산지역에서도 뜻있는 인사들을 중심으로 [[구제고등학교]]에 준하는 고등교육기관 설립 움직임이 일어나게 된다. 한편으로는 마산에 살고 있는 일본인들도 일본인들대로 일제 당국에 불만이 많았는데(...) 마산공립심상고등소학교에 고등과를 설치하여 일본인 자녀들에게 중등교육을 시키고 있었으나 이 역시 깡통학력인 것은 마찬가지였으므로, 일본인들도 공립중학교 설치 요구를 줄기차게 요구했다. 특히 마산공립상업여학교를 마산고등여학교로 전환하여[* 대부분 일본인 입학생들이 많았고 조선인은 약 20% 정도] 설치한 사례가 있었는데다 진해 신시가지와 원마산 상권에 밀리는 신마산 일본인들의 지역간 알력다툼까지 겹쳐, 고등교육기관 설치 운동은 일제 행정당국을 여러 모로 골치아프게 만들었다. 우선 마산공립심상고등소학교의 분교를 원마산 근처에 설치해 일본인들의 민심을 달래고자 했으나(현 무학초등학교) 이로서는 수요를 충족할 수 없었다. 게다가 조선인들이 세우려는 고등보통학교 설립운동이 점점 활기를 더해가자, 결국 공립중학교를 설치하면서 조선인도 일부 받도록 하여 무마시켰다. "공립중학을 설치해줬으니 니들 학교는 필요없지?" 라는 식으로 호신, 창신, 노동야학을 폐교시켜버린 것이다. 나중에는 일본인 학교였던 심상고등소학교의 고등과도 폐쇄시킨다. 설립 부지는 당시 신마산과 원마산 사이 군사용지로 텅 비어 있던 중앙마산[* 현 마산합포구 자산동, 완월동, 중앙동, 장군동 일대]을 개발하고 그 산중턱에 학교부지를 마련했다. 아울러 마산여고도 마산중학 인근으로 이전시켰는데, 현재에도 완월동 인근에 마산고, 마산여고, 완월초등, 마산중, 성지여중, 성지여고, 월성초등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건 이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1936년 5년제 마산공립중학교가 개교했다. 일본인 학생이 다수였으며 조선인은 30% 정도였다고 한다. 학교의 상징(교표)는 아래에 나오는 것처럼 무학 마크가 아니라 [[벚꽃]]을 형상화한 문양이었고, 이 문양이 교모 등에 붙어있었다고 한다. 일명 독수리마크라 불리는 무학 교표는 해방 이후 제정되었다. 조선인 학생 수가 적어서 일제강점기물 특유의 [[이지메]]가 있었을 법도 한데 의외로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심지어 학교 역사 기록물에 보면 해방 후 귀국하는 일본 학생들을 두고 양쪽으로 도열해서 서로 눈물을 닦는 사진도 있다(...) 여담으로 본관 건물 철거가 결정된 1997년 이후로 실제 철거에 들어간 2000년 사이 이 당시 일본인 졸업생들이 학교에 많이 방문했다. 그런데 이 시기에 일본인들이 다수인 학교 한가운데에서 '''독립운동 비밀조직'''이 결성된 적이 있다. "마중독립단"이 그것으로, 1944년 6월 학교 지하창고[* 현 교사 동측 반지하 시설물은 구 본관 시절에도 반지하 창고와 옥외 변소가 있던 곳이었다.]에서 2, 3, 4학년을 중심으로 결성되었다. 현재 알려져 있는 가담자는 박기병, 박후식, 감영재, 조이섭, 강성중, 박성수(이상 8회), 김학득, 강순중(이상 7회), 이주국(6회). 일제 당국이 고문을 가해 얻어 낸 자료이기 때문에 알려지지 않은 조직원이 더 있을 것이란 추정이 가능하다. 이들은 7월 일제 당국에 검거되었고, 개중 2명은 구류로 풀려났으나 중심인물인 김학득은 모진 고문을 당하고 마산형무소[* 현재의 회성동 마산교도소가 아니라 불종거리 삼성생명 빌딩 터에 있었다.]에 투옥되었다가 [[8.15 광복]]을 맞으며 풀려났다. 학교 한 켠에 뜬금없이 항일운동 기념비가 서 있는 것은 이 까닭. 1994년 세워졌다. 1950년, 학제가 미국식으로 개편되면서 1~3학년 과정이 마산중학교로 분리되었고, 마산고등학교는 3년제 고등학교로 거듭났다. 그리고 1달 뒤에 [[6.25 전쟁]]이 터졌다. 마산은 최전방 전선이었기 때문에 교사는 징발되어 야전병원으로 쓰였다. 현재의 솔밭 옆 한우아파트 자리는 공동묘지 터이며, [[합포고등학교]] 자리는 화장터가 있었던 자리다(!). 그래서인지 90년대말까지만 해도 운동장 파 보면 유골이 나올 거란 소문이 돌기도 했다. [[파일:1950 마산고등학교 운동장.jpg]] [[파일:1950 마산 완월동.jpg]] 1950년 7월 마산고등학교 교정에 주차되어 있는 미군 군용 트럭([[CCKW]])과 당시의 마산 시가지. 1952년 현재의 무학초등학교 인근에 이름이 똑같은 '마산고등학교'라는 또 다른 교육기관이 설립되었으나, 이내 현 마산고등학교로 흡수 통합되었다고 한다. [[파일:external/www.knnews.co.kr/20100302.01010107000001.02L.jpg]] 1960년 [[4.19 혁명]] 당시 시위대의 '''선봉에 섰던''' 학교다. 해당 항목 참조. [[3.15 부정선거]] 규탄시위 당시 맨 앞줄에서 희생된 김용실 군은 당시 마고 1-C반 급장이었고, 다수의 학생들이 3.15 의거에 참여했고 일부는 사망, 부상당했다. 이후 4월 11일 [[김주열]] 군의 시신이 신포동 중앙부두에 떠오르며 촉발된 제2차 마산의거에서 선봉에 선 두 학교 중 하나였다. 마산고는 김용실을 잃었고, 마산상고는 김주열이 입학예정자였기 때문. 이들 시위대 중 일부는 마산여고에 몰려가 시위참가를 독려했는데 교장이 직접 여학생들을 인솔해서 나오는 풍경이 부산일보에 실려 전국으로 타전되었다. 그리고 이 사진은 [[고대생 습격 사건|4.18]]에 불을 붙였다. 현재도 3.15 기념식이 열리는 날에는 수업을 하지 않고 당시 시위에 참가했던 학교의 학생들이 기념식에 참가하여 묘지를 참배한 후 시가행진을 한다. 아래 교복 항목에 있는 사진이 단체 묵념하는 모습. 1974년 마산/창원공단의 청년 노동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방송통신고등학교가 설립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야간생', '방통고생'이라고 하여 현재도 마고 교실에서 수업을 진행하는데 겹치는 시간대가 거의 없기 때문에 재학생과 야간생은 서로 거의 모른다. 자율형공립고로 지정된 것에서 보듯 [[경상남도교육청]] 차원에서 뭔가 진행되는 사업이나 시행규칙 등은 항상 마고가 시범케이스가 된다. 이게 좋은 쪽이라면 다행인데 가끔은 안 그런 것도 있어서 문제.(...) 이외에도 타 시군에서 전입 오는 사례가 있으면 거의 마고에 배정되고, 그래서 학교 앞에 '하숙'이 드물게 남아있다. 물론 지금은 하숙집 기능은 하지 않지만, 주로 재학생들이 야간자율학습 전 저녁식사 시간에 외출하여 가정식 저녁밥을 먹는 용도로 쓰인다. 1960~1970년대 당시(연합고사 실시 전)에는 시골에서 올라온 학생들이 많아서 하숙촌이 번성했으며, 특히 기차통학이 가능했던 [[함안]]이나 진영과는 달리 [[거제]]나 [[통영]]에서 올라온 학생들은 100% 하숙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