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상재 (문단 편집) == 설명 == [[격구]]와 더불어 왜 무예인지 모르겠다는 사람들이 많으나 이는 오늘날의 무술에 대한 잣대로 과거를 바라보기에 일어나는 일이다.당시는, 말 위에서 제대로 움직일 수 있는 신체의 탄력이 곧 기마궁술, 기마창술, 기마검술로 연결되는 매우 기초적인 훈련으로 볼 수 있는 시대였다. 말 위에서 몸을 격렬하게 움직일 수 있는 탄력이 없으면 앞의 마상 무술들은 제대로 쓸 수가 없었다. 한민족의 기마술이 매우 대단했으며 북방기마민족설에 대한 실질적인 역사자료가 되기도 하는데,[* 한민족 북방기마민족설의 또다른 증거자료로 한복이 있다. 한복의 스타일은 북방유목민족적 요소가 많이 남아있다.] 조선이 좁은 반도였고 기마부대를 그렇게 폭넓게 운용할 이유가 별로 없는데도 꾸준히 육성하고 무예의 일환으로 다룬 것에는 의미가 있다. 조선시대의 마상재 중에는 상당히 수준이 높고 위험한 기술들이 많았다. 특히 일본에 [[조선 통신사|통신사]]로 가서 시연을 보였던 기병들은 칭송이 일본열도를 뒤흔들 정도였으며, 통신사가 올 때 꼭 마상재 하는 사람들을 보내달라고 할 정도로 수준이 높았다. 더 나아가 마상재는 전국시대와 에도 막부를 거치며 의장용 마술이 되어버린 지 오래였던 일본의 마술에 깊은 영향을 주기도 했는데, 카와고에 번(현재의 [[사이타마 현]])에서 새로이 성립된 마술 유파인 '''조선류요마술(朝鮮流要馬術)'''이 그 대표적인 예시이다. 조선류요마술은 그 창시자 가문인 유사씨와 친분 관계가 있던 나카야마 요시타케에 의해 일본 제 2의 말 생산지였던 [[토사 번]](현재의 [[고치 현]])으로 전파되면서 더욱 유명해져 서양 마술이 들어오는 19세기 말 전까지 토사 번을 대표하는 세 가지의 마술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http://m.riss.kr/search/detail/DetailView.do?p_mat_type=be54d9b8bc7cdb09&control_no=c3918db3943cf5feffe0bdc3ef48d419#redirect|출처: 이명진,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 마상재(馬上才) 공연과 일본의 마술(馬術) : 조선류요마술(朝鮮流要馬術)을 중심으로, 영남대학교 대학원, 2019년 2월]] 마상무예를 연마하는 말들은 전체적으로 다리가 짧으며 몸이 튼튼한 호마를 사용하였다. 지금도 무예도보통지의 마상재 캡쳐 짤들은 조선시대 [[과거 제도]]가 얼마나 빡빡했는지 농담삼아 강조할 때 자주 언급된다. 말 등에서 꼿꼿하게 선 다음 옆으로 각각 1회씩 윈드밀을 도는 삽화를 보면 문과뿐만 아니라 무과 역시 고인물 판이었으리라는 상상이 되는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