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오리족 (문단 편집) == 백인들과의 공존 == 아벨 타스만의 항해 이후 유럽인들에게 알려진 뉴질랜드에는 18세기 중후반부터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포경선원들이 오가기 시작했으며, 곧 [[선교사]]들이 뒤를 따랐다. 프랑스의 가톨릭 선교사들과 영국의 개신교 선교사들이 마오리족에게 기독교를 전파할 목적으로 학교를 세웠고, 이미 19세기 초반에 이르면 마오리족 중에서도 유럽 상인에게 머스킷총을 구입하고,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에서 영어를 배운 이들이 나올 정도였다. 와이탕이 조약 당시 마오리족의 족장이었던 호네 헤케(Hone Heke)도 영어를 알고 있었다. 1840년 와이탕이 조약 당시 마오리족은 백인과 동등한 권리를 인정받지 못했고 뉴질랜드의 모든 강과 바다의 산물에 대한 권리만을 인정받았다. 마오리들은 번역과 상식의 차이로 자신들의 땅이 영국에 귀속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불리한 조약을 맺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영역을 확장해가는 백인 이주민들과 마오리족과의 충돌이 이어지면서 결국 두 차례에 걸친 전쟁이 터졌다. 하지만 전쟁 당시 마오리족은 이미 서구 문물을 들여와 [[머스킷]]과 장검, [[대포]]로 무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식민지들과 달리 뉴질랜드의 식민 정부는 [[뉴질랜드]]를 요새화하고, 전쟁 전에 '''총독 관저를''' 마오리인들이 시원하게 태워버려 초대 총독인 윌리엄 홉슨은 '''군함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youtube(CpFQpp_YrrI)] 와이탕이 조약에 대해 다룬 다큐멘터리로, 영국인과 마오리족의 관점의 차이 등을 다루고 있다. 이러한 저항에 대응하기 어려웠던 뉴질랜드 정부는 마오리족에 대한 회유책으로 1867년도부터 마오리족의 투표권과 피선거권을 인정해줬고, 마오리 선거구도 설정되어서 뉴질랜드 의회에 자체적으로 마오리 의원도 선출할 수 있었다. 이는 호주 원주민과 미국, 캐나다의 원주민들이 1920년대와 1960년대가 되어서야 참정권을 가지게 된 것과 대조적이었다. [[뉴질랜드]] 정부는 [[마오리어]]를 법적 공용어로 인정해주었고[* 말장난같은 이야기지만 영어는 뉴질랜드의 법적 공용어가 아니다. 단지 대다수 뉴질랜드인들의 모어가 영어이고 공식적 상황에서 널리 통용되어 실질적 공용어 역할을 하는 것이다.] 국가도 마오리어와 영어 순서로 부른다. 정부 홈페이지도 마오리어와 영어 모두로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유권자의 대다수가 백인이었으므로 마오리족이 정계에서 쓸 수 있는 힘은 제한적이었고 뉴질랜드 정부에서는 꽤나 오랜기간 동안 마오리 문화 전수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었다. 교육에서도 영국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고 학교에서 마오리어 사용을 하면 체벌이 가해지는 등 암묵적인 차별을 가했던지라 마오리족들도 영국을 비롯한 유럽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그나마 마오리족의 대다수가 농어촌에서 살았을 때는 마오리 문화의 전수가 순조롭게 진행되었지만 도시화의 바람이 불면서 마오리 문화의 대다수가 사멸위기에 처했다. 6, 70년대 마오리족이 대부분 도시로 이주함으로써 대다수가 고유 문화에서 이탈해 마오리 언어와 문화가 사멸 위기에 처하자 마오리 언어와 문화 보전에 노력하지 않았던 뉴질랜드 정부에 대해 마오리 문화/언어를 보급하는데 노력하라고 요구했고, 이에 따라 1987년부터 마오리어가 법적 공용어가 되었다. 뉴질랜드 정부는 현재 마오리족을 대상으로 마오리어 보급운동을 벌이고 있다. 마오리족은 현재 [[뉴질랜드]] 인구의 [[http://www.stats.govt.nz/browse_for_stats/people_and_communities/maori/census-snapshot-maori.aspx|1/6 가량을]] 차지하고 있으며, 위와 같이 그나마 백인에게 꿀리지 않고 저항한 역사 때문에 [[호주]]의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어보리진]]이나 [[아메리카 원주민|북미 원주민]]들에 비하면 나은 사회적인 대접을 받고 있는 편이고[* 물론 북미 원주민이나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도 [[리틀 빅혼 전투]]의 [[타탕카 이요탕카]]나 [[http://koreanherald.com.au/?p=14237|페뮬우이]]처럼 백인들에게 적극적으로 저항한 자들은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북미 원주민들은 리틀 빅혼 전투 이후로는 백인들에게 제대로 된 승전 사례가 없었고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은 진작에 서구 무기로 무장한 마오리족들과는 달리 [[부메랑]]같은 원시적인 무기로 무장한 탓에 마오리 전쟁 당시 영국과 마오리족의 사상자 비율은 745 : 2154였으나(약1 : 2.89로 영국군 1명 죽을 때 마오리족도 3명이 안되게 죽었다는 것이다. 유럽과는 동떨어진, 그러면서 문명의 이기를 상대적으로 늦게 받은 민족임에도 사상자 비율을 저정도로 낮게 유지한건 대단한 일이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은 백인과의 사상자 비율이 2000~2500:40000이었다.(최소 1 : 16이며 최대 1 : 20이라는, 영국군 1명 죽을 때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은 최소 16명, 최대 20명까지 죽는다는 압도적 격차다.)물론 마오리족이 서구 무기로 무장하지 못했거나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이 진작에 서구무기로 무장했었다면 백인과의 사상자비율이 서로 큰 차이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마오리족 후손들은 국가로부터 각종 복지 혜택과 정부 지원금을 받는다. 하지만 여전히 전통문화를 잃어가며 가난 속에서 고통받는 마오리족도 적지 않은 편이다. 가난한 마오리족들은 범죄에 노출되기 쉬워, 2005년에는 전체 감옥 수감자 비율의 절반 가량이 마오리족일 때도 있었다. [[http://www.nzherald.co.nz/nz/news/article.cfm?c_id=1&objectid=10352444|기사]] 실제로 오클랜드 남부의 일부 지역(오타라라던지…)들은 슬럼에 비유되는 경우가 있는데 많은 주민들이 마오리를 포함한 남태평양 원주민 계이기는 하다. [[뉴질랜드]] 정부는 범죄에 노출되는 마오리를 보호하고자 각종 복지 사업을 제공하고 있는데, 이로 인한 역차별 문제도 발생하고 있어 여러모로 골치 아픈 상황이다. 해당 상황에 대한 창작물은 밑의 창작물에서의 마오리족 문단 참조. 제임스 쿡 상륙 250주년을 맞이하는 기념행사 때문에 논란이 있는데, 당장 마오리족들은 반발이 큰 상태이다.[[https://n.news.naver.com/article/001/0011130196|#]]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