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오쩌둥 (문단 편집) === 마오가 점지한 후계자들 === 마오가 처음 후계자로 점찍었던 것은 고향 후배 [[류사오치]]였다. 류사오치는 대장정 중의 쭌이회의에서 마오를 지지하여 마오가 당권을 되찾는 데 큰 역할을 했기 때문에 그를 신임하게 되었다. 그리고 류사오치는 홍구파인 다른 [[중공중앙]]의 주류들과 달리 도시 노동자 운동을 전개한 백구파 지도자였고, 농촌에 기반했다는 이유로 마가린 공산주의라고 눈을 홉뜨고 있는 스탈린을 설득하기에도 좋은 선택이었다. 따라서 1945년, 7차 당대회 이후 류사오치는 마오쩌둥이 휴가나 외유를 떠날 때마다 중앙위원회 주석직을 대행하면서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기능하였다. 하지만 중국공산당 내부에서 군신관계에 가까운 카리스마를 구축했던 마오쩌둥은 류사오치가 독립적인 후계자로 마음대로 하게 놔둘 생각 따윈 전혀 없었고, 얼굴마담 정도로 적절히 이용해먹으면서 자신에게 복종하게 하려고 했다. 이 과정에서 가오강-라오수스 사건이 적절하게 이용됐고 류사오치는 마오쩌둥에게 기게 된다. 대약진 운동 시기, 마오쩌둥은 반모진론을 내세운 저우언라이와 천윈을 조지면서 국무원을 마비시키고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의 서기처에게 대약진 운동 집행을 맡기는 등 류사오치의 위세는 더욱 올라가게 된다, 대약진 운동이 한창이던 1959년 4월 27일, 마오쩌둥은 귀찮은 의전으로 자신을 괴롭히는 국가주석직을 그만두고 이를 류사오치에게 넘겨주었다. 물론 권력의 중핵인 당중앙위원회 주석 및 중군위 주석직은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1960년을 넘어가면서 대약진 운동이 중공중앙 지도부의 상상을 초월하는 대참사임이 드러나게 되었고, 마오쩌둥은 총노선은 옳았으며 성공이 9할, 실패가 1할이라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으나 류사오치는 천재가 3할, 인재가 7할이라는 주장을 하면서 마오쩌둥에게 맞섰다. 거기에 일단 국가주석으로 '류 주석'으로 불리게 된 류사오치의 위세는 더욱 올라가 중국은 마치 두개의 태양이 떠 있는 듯한 형상이 되었다. 반면 마오쩌둥의 권위는 상당한 타격을 입어 1962년, 7천인 대회에서 펑전이 마오쩌둥의 자아비판을 요구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다. 마오쩌둥은 마지못해 자아비판을 해야 했지만, 그는 복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여기에 1964년, 흐루쇼프가 쫓겨나면서 마오쩌둥은 류사오치가 자신에게 같은 짓을 할 것이라고 의심하게 되었고 1965년에 그를 후계 선상에서 완전히 배제하고 [[문화대혁명]]을 통해 숙청하였다. 류사오치는 [[문화대혁명]]으로 실각하고 [[홍위병]]들한테 조리돌림 당한 다음에 비참하게 삶을 마감한다. 마오쩌둥은 류사오치를 배제한 이후 펑전과 덩샤오핑 중에 한 사람을 후계자로 삼으려 했으나 펑전이 7천인 대회에서 반기를 들자 그를 즉각 배제하고 역시 문혁을 통해 숙청했으며, 덩샤오핑도 류사오치급 배신자는 아니지만 교정이 필요하단 이유로 타도하고 지방으로 하방시켰다. 그 이후 떠오른 것은 [[린뱌오]]였다. 린뱌오는 [[정강산 투쟁]]에 참전한 오랜 전우로, 비록 정신상태는 좀 맛이 간 상황이었지만 마오쩌둥에 대한 충성심은 제일 확고했다. 그는 군내에서 마오쩌둥 우상화를 적극 추진하였으며, 펑더화이, 류사오치, 덩샤오핑, 펑전, 루딩이 등 마오쩌둥이 조지라고 던져준 희생양들을 가차없이 물어뜯으면서 진가를 발휘했다. 여기에 국방부장 재임시에 [[중국-인도 국경분쟁|중, 인 분쟁]]에서 [[인도군]]을 대파했기 때문에 군공도 컸다. 덕분에 린뱌오는 1966년 8월, 8기 11중전회에서 유일한 부주석으로 선출, "마오주석의 친밀한 전우"로 떠올랐다. 하지만 린뱌오는 국가주석직 폐지 문제를 놓고 마오쩌둥과 티격태격하다가 1970년 9기 2중전회에서 제대로 타격을 맞게 되었고, 이판사판으로 [[571 공정]]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달아나던 중 [[9.13 사건|비행기 사고]]로 사망한다. 다만 마오쩌둥은 린뱌오의 군권이 지나치게 강화된 것 때문에 어차피 그를 숙청할 계획이었다는 분석도 있으며 571 공정의 실체에 대해서도 많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그 다음에 떠오른 것이 [[4인방]]의 1명이던 [[왕훙원]]이다. 초등 중퇴인 일자무식이었던 왕훙원은 [[문화대혁명]] 당시 [[상하이]]에서 조반 운동을 하며 떠오르고 곧 문화대혁명의 중심 인물이 된다. 그리하여 중앙 정계로 발돋음했고, 마오쩌둥은 그를 눈여겨보다가 후계자로 삼으려고 여러 책임을 맡겼다. 하지만 그릇이 아니었던 왕훙원은 마오의 기대를 저버리고 중앙 정계에서 권력에 탐닉하고 여러 실무에서 무능을 보이는 등의 실책을 보이다가 눈 밖에 났다. 왕훙원에게 실망한 마오쩌둥은 다시 덩샤오핑을 데려왔지만 덩샤오핑이 실용적 관점에서 실시한 개혁인 정돈사업이 부르주아적이라고 불만을 품게 되었고, 여기에 장칭과 마오위안신이 덩샤오핑이 주자파 반동이라고 이미 판단력이 맛이 간 마오쩌둥 옆에서 열심히 세뇌를 하면서 1976년 4월 7일 정치국 회의에서 덩샤오핑을 숙청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마오쩌둥이 선택한 사람은 후난성 고향 후배인 [[화궈펑]]이었다. 당시 후난성 당서기를 맡고 있었고 중앙 정계에서는 무명에 가까운 인물이었는데, 마오쩌둥은 그가 [[문화대혁명]]을 계속하면서도 장칭에게 지나치게 놀아나지 않고 어느 정도 중용의 노선을 걸으리라고 기대하고 그를 저우언라이의 후임 총리 및 중앙위원회 제1부주석으로 보선하면서 후계자로 지명했다. 마오 사후에 화궈펑은 사인방을 숙청하고 권력을 공고히 하는 듯 했으나, 결국 노회하고 당 커리어가 훨씬 높았던 [[덩샤오핑]]에게는 역부족이어서 권력을 빼앗기고 만다. 결국 마오쩌둥이 점지한 후계자들은 하나같이 모두 실패한 셈.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