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만력제 (문단 편집) === 만력중흥(萬曆中興) === [[파일:external/pic.pimg.tw/22efffdbd9e9750d02a159f09530aa5b.jpg|width=250]] [* [[면류관]]이 얼굴을 가리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면류관을 돌려서 그린 어진이다.] 후대에는 최악의 [[암군]]이라는 평을 듣지만 처음부터 [[암군]]은 아니었다. 10살 어린 나이에 황제의 자리에 즉위한 만력제는 즉위 초 10여 년간 자성황태후 이씨[* 밑에서도 언급되는 만력제의 생모로 [[궁녀]] 출신이었다.]의 후원을 받는 대학사 [[장거정]]과 환관 풍보(馮保)의 도움을 받으며 통치에 대단한 관심을 보이고 [[명군]]의 자질을 드러냈다. 당시 [[조선]]의 사신으로 갔던 [[조헌]]이 당시의 만력제를 보고 '이번 황제는 훌륭한 군주의 자질이 보인다'며 사행기에 칭찬을 써 놓기도 했다. 또한 만력제는 [[서예]]에 관심이 많아서 겨우 10세에 1척(尺) 이상이나 되는 큰 글씨를 쓸 수 있을 정도로 재능이 있었다. 후일의 만력제를 생각하면 참으로 아이러니한 평가. [[명나라]] 왕조의 통치 체계는 환관 조직과 관료 조직의 대립으로 나타나는데, 풍보와 [[장거정]]은 드물게도 장기간에 걸친 연립 내각을 구축해 국정을 장악하고 개혁을 추진했다. [[장거정]]은 내치에서는 기강 확립, 태만한 관료의 정리 작업, [[황하]] 하류의 치수 사업, 무엇보다 토지·세제 개혁인 [[중국사/세금 제도#s-12|일조편법(一條鞭法)]] 등의 업적을 남겼다. 또 외치로는 [[척계광]]·[[이성량]](李成梁)을 [[요동]]과 [[몽골]]에 파견하여 북로(北虜)를 막고, 또 절강·복건·광동의 해안 방어에도 주력하여 남왜(南倭)의 움직임도 봉쇄했다. 풍보 또한 [[환관]] 조직을 통제하여 조정을 장악하고 장거정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하지만 1582년에 [[장거정]]이 죽고 2년 후, 만력제는 돌변하여 "장거정이 언관을 억제하고 황제의 총명을 막았으며, 정권을 농단하고, 황상의 은혜를 저버렸으며, 불충을 도모했다."라는 조칙을 내려 [[부관참시]]하고 작위를 박탈한 후 가산을 몰수해 버렸으며, [[장거정]]의 장남은 고문받다가 자결하게 하고, 유족들이 굶어 죽기까지 했는데도[* 황제가 구속영장(?)을 발부하기도 전에 [[환관]]들이 이를 귀신같이 알아채고 저택에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들어가지 못하게 봉쇄하는 바람에 십수명이나 굶어 죽었다.] 눈도 깜박하지 않았다. 풍보 또한 조정에서 쫓겨났다. 이것이 만력제가 어긋나는 출발점이었다. 이에 대한 해석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일단 [[장거정]]과 풍보가 둘 다 표리부동한 인물이었음이 만력제 타락의 계기가 아닌가 하는 이야기가 있다. 장거정은 어린 만력제에게 무척이나 엄격한 스승이었다. 황제의 스승이었던 장거정은 직접 [[교과서]]까지 만들어가면서 어린 만력제를 열성적으로, 또는 [[아동학대]]에 가까울 정도로 가르쳤다. 장거정은 만력제에게 어제 학습한 경서나 역사에 관한 내용을 외우도록 시켰는데, 외운 내용이 물 흐르듯이 나오면 칭찬을 했지만 더듬거리거나 잘못 이야기하면 분노하여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심하게 갈궜다. 특히 장거정은 재물 축재나 유흥에 극도로 엄격한 모습을 보였는데, 그림 그리는 것조차도 "심취하다가는 [[송휘종]]처럼 나라를 말아먹을 수 있다.", ''황제가 그림에만 지나치게 빠지면 조정을 올바로 다스리지 못하고 심지어는 망국의 참화를 불러온다." 운운하며 자제를 요구했는데 정도가 지나쳐서 폭언이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다만 이런 장거정에 대한 어린 만력제의 두려움과 존경심은 대단해서, 장거정이 집을 신축한다고 하자 자신의 용돈에서 1천 냥이나 뽑아서 스승께 드렸을 정도였다. 그리고 반대파가 비난했듯이 장거정은 신하로서는 도가 지나칠 정도로 처신이 오만하고 불손해서, 만력제한테는 거의 횡포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특히 [[명나라]]가 [[전제군주제]]인 만큼, 장거정의 행동 자체가 황제를 업신여기는 행태였다. 장거정이 귀양길에 [[척계광]]이 보내준 관군으로, 자신의 [[가마(탈것)|가마]]를 호위하게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척계광도 만력제한테 제대로 밉보였다. 그래서 만력제는 군대를 사적(私的)으로 이용하고, 장거정과 함께 반란을 모의했다는 명목으로 척계광에게 면직 처분을 내렸고[* 사표도 받아주지 않고 바로 파직한다. 문제는 이때는 [[몽골]]과의 전쟁이 한창이라서 장수 하나가 아쉬운 마당에 이런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심지어 [[몽골군]]한테 명군이 깨지는 걸 보다 못한 하남도 어사 부광택이 척계광 좀 다시 불러 달라고 애원했으나 오히려 크게 화를 내며 거부했고 부광택의 2달치 월급을 빼앗았다.], 제대로 장거정의 일족을 죽이는 명분으로 삼았다. 사실 전근대의 중국에서 황제의 권위나 권력에 대등하게 보이는 행위를 하는 것은 황제를 능멸하는 행위인 터라 구족을 멸할 대죄 중의 대죄이다. 장거정의 반대파는 장거정이 반역을 했다고 고발했지만 만력제도 이는 사실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장거정은 평소에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이윤]]·[[곽광]]과 같은 명신에 비유해 아부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하는데, 이들은 확실히 명신이었지만 자신의 주군이 정치를 게을리한다는 명목으로 주군을 그 자리에서 내쫓은 신하들이다. 군주인 만력제가 이런 비유를 듣고 그러려니 했을 리가 없다. 또한 장거정은 자신의 개혁 정치를 수행하기 위해 측근을 기용하고 정적들을 탄압하며 무리하게 정책을 밀어붙임으로써 사람들의 불만이 컸는데, 그가 예상치 못하게 사망하자 반대파가 행동에 나서 이들의 모함성 떡밥을 만력제가 물었다는 얘기도 있다. 장거정은 집권 중 그의 아버지가 사망하자 황제에게 탈정[* 군주가 신하의 3년상을 제하고 벼슬을 계속하게 하는 것.]을 명 받고 계속 현직에 머물렀는데, 이는 당시의 [[성리학]] 세계에서 매우 큰 반발을 사야 했다.[* [[유교]]가 국가 이념으로 자리잡은 [[명나라]]에서는 대부분 신하들이 탈정 명령을 조용히 거부하고 고향에 물러나 3년상을 지냈다. 황제도 신하가 당연히 거절하고 3년상을 지내러 갈 것을 알기에 훌륭한 신하에게 '너는 정말 능력있는 신하'라는 것을 보여주는 겉보기식 명령이다. 그러니 당연히 탈정이 순수한 만력제 본인의 뜻이라고 보는 사람은 당시나 지금이나 아무도 없다.] [[장거정]]의 일파였던 사람조차도 탈정을 취소해야 된다고 주장하다 탄핵을 받고 물러나야 했을 정도였는데, 장거정이 탈정 중에 치러진 만력제의 국혼에 화려한 예복을 입고 참석하자 '사람으로서 기본이 되지 않은 불효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무엇보다 스승으로서 숨통이 막히게 만력제를 다스렸던 장거정에 대한 반발심 때문이란 견해도 있다. 특히 아버지 [[융경제]]가 태자의 사부로 붙여준 장거정과 융경제의 측근 환관이었던 풍보는 만력제의 사생활을 엄격하게 통제했으며, 만력제가 9세의 나이로 황제가 된 후에도 매달 3·6·9가 들어가는 날 오전에만 신하들의 상주를 받고 나머지 날은 공부를 시켰다. 거기다 이들은 자성황태후의 후원을 받았기에 만력제는 황제가 된 이후에도 이들에게 기를 펴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만력제가 놀자판을 벌일라 치면 옆에 붙은 환관들이 풍보에게 이를 알리고, 풍보가 다시 이를 장거정이나 자성황태후에게 고해 자성황태후가 만력제를 불러내서 이를 질책하였고, 만력제로 하여금 '죄기조(罪己詔)'라는 제목으로 반성문을 여러 번 쓰게 한 적이 있을 정도. 심지어 자성황태후가 심하게 화났을 때는 "노왕(潞王)[* 자성황태후의 차남이며 만력제의 동복동생인 주익류(朱翊鏐)를 말한다.]을 황제 시킬 걸 그랬다." 하면서 조상들에게 [[석고대죄]]를 하여 만력제로 하여금 싹싹 빌도록 만들기도 했다. 그래서 이 시기의 만력제는 황제 노릇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만력제가 탈선한 것은 이러한 상황이 빚어낸 결과일지도 모른다.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장거정과 자성황태후가 죽고 나서야 만력제는 [[사춘기]]를 맞이한 것이다. 하지만 풍보 또한 장거정과 마찬가지로 사적으론 상당히 부패하여 사적 이익을 많이 챙겼고, <풍보전>에 의하면 '풍보가 싫어하는 자는 모조리 쫓아냈다'고 할 정도로 권력을 탐하는 모습을 보여 적이 상당히 많았다. 때문에 [[장거정]] 사후 강서도 어사 이식, 절강도 감찰어사 왕국칙에 의해 탄핵당하고 남경으로 유배가게 된다. 어쨌든 이 사건은 만력제 개인에게 큰 영향을 끼쳤는데, 신하들의 능력과 도덕성을 불신하고 정치에 환멸을 느꼈기에 이후로 황제의 업무에서 손을 놓아버렸다는 해석이다. 한편으론 핑계가 아니라 만력제가 진짜 아파서 그랬다는 의견도 있다. 만력제는 누군가에게 부축을 받지 않고는 혼자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비만]]이었고[* 실제로도 초상화를 보면 [[비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등과 다리가 굽은 신병(身病)을 앓아 움직이기를 싫어하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한마디로 [[비만]]이나 [[척추]]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인데, 실제로 만력제의 유해를 조사한 결과 등이 심하게 굽었음은 사실이라고 확인되었다. 여기에 [[아편]]에 중독되어 무기력증에 걸렸다는 의견이 제시되기도 한다. 또는 어려서 총명함을 보였던 그가 장거정이 죽은 뒤에 급격히 정무를 게을리한 사실을 두고 '자신이 믿고 의지하던 인물을 잃음으로써 심각한 우울증을 앓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다만 만력제가 언제부터 그런 상태였는지 확인할 수가 없고,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에 의해 유해가 훼손되어 이쪽으로는 더 이상 연구가 불가능하게 됐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