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만력제 (문단 편집) === 전방위적 국가 붕괴 === >기강이 해이해지고, 군신이 통하지 않으며, 이익을 쫓는 소인배가 분주히 돌아다니며 서로 다퉜다. [[명나라]]는 실로 만력제 때 망한 것이나 다름없다. >---- >명사(明史) >[[숭정제]]를 망국의 군주라고 비난해서는 안 된다. 그 책임은 '''만력'''·[[태창제|태창]][* 태창제는 즉위 직후 비어있던 관직을 채우고, 국고를 열어 빈민을 구제하거나 군대에 보급품을 챙겨서 보내는 등 일이라는 걸 했고, 이 때문에 백성들 사이에서는 "뛰어난 황제가 왔다"는 반응이 있었을 정도였다. 재위기간이 고작 한 달도 안 되었기 때문에 거의 저런 조치를 하자마자 죽은 셈이라 딱히 나쁜 짓을 할 시간도 없었다. 쇠퇴기의 임금이었다는 까닭으로 태창제가 나머지 둘과 같이 책임을 추궁받는 것은 억울한 감이 있다. 다만 [[전제군주제]]에서는 군주가 바뀌는 것 자체가 정치적 혼란을 가져오기 쉽고 바뀌는 사이클이 짧으면 짧을수록 혼란이 가중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오래 사는 것도 군주의 중요한 임무라고 볼 수도 있다. 무난한 군주가 29년 집권하는 것과 유능한 군주가 29일(태창제 즉위기간)마다 갈리는 것, 어느 쪽이 국가가 평화로울지를 생각해보면 일각에서는 태창제가 명 황실 내부의 권력 투쟁으로 암살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음을 두고, "황제가 암살당할 정도로 황실 관리, 즉 권력의 중추에 있는 인간들을 똑바로 관리하지 못했음을 비판하는 의도가 아니었겠냐"고 해석한다.]·[[천계제|천계]]에게 돌아가야 한다. 이들에게는 [[제사]]도 지내지 말아야 한다.[* 위의 황제들은 [[명말 3대 의안]]으로 묶여 명나라 멸망의 원인으로 손꼽힌다.] >---- >[[강희제]] 여하간 황제가 30년간이나 파업을 한 덕분에 중급 이하의 관리들 중에는 황제를 단 한 번이라도 봤던 경험조차 없는 사람이 많았고, 하다하다 '''재상마저 황제의 얼굴을 까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만력 34년(1607)에 임용된 재상 이정기(李廷機)가 재상직을 때려칠 때의 상황을 보면, 당시 [[명나라]] 중앙 부처 9부의 관직 31개 가운데 24자리가 공석이었고, 호부와 통정사를 제외하고는 책임자가 없었으며, 도찰원과 대리사는 도장마저 없었다. 이걸 재상이 다 땜빵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할 일은 과다한데 [[동림당]]의 견제가 장난이 아니었기에 사표를 썼는데... 문제는 만력제가 [[사직서]]조차 처리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이정기는 기다리다 지쳐 [[푸젠성|복건성]]으로 다시 이사해 절에 묵으면서 사직서를 5년간 152번이나 보냈지만 황제는 묵묵부답. [[동림당]]에선 [[짜고 치는 고스톱]]이란 반응까지 나오면서 더욱 모함이 심해졌고, 결국 참다못한 이정기가 그냥 집에 가버리는 일까지 벌어졌다. 원래는 황제를 능멸한 죄로 목이 달아나야했겠지만 만력제가 잡아오라는 지시조차 하지 않았기에 이정기는 집에서 4년을 더 살다 죽었다. 대체 이정기의 부고는 어떻게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만력제는 '문절(文節)'이라는 시호를 내려주고 끝냈다... 정부가 일을 못하거나 권력을 잃어버리는 경우는 있었어도 직제표 자체에 구멍이 숭숭 뚫린 경우는 [[중국사]]를 통틀어서도 매우 드물다. 그러나 조정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자신의 취미에만 몰두했다. 장엄한 국가제사의식을 포함한 행사들은 전부 귀찮은 일들로 간주되어 생략되었고, 도저히 생략할 수 없는 경우에도 관리들에게 떠넘겨 대행하게 하였다. 제국의 정치기구가 공전되자, 문관들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최상부로 승진할 희망이 없어졌지만 황제는 이런 생활이 이미 습관이 된 듯했다. 만력제에게는 이런 복잡한 국면을 해결할 의지도, 생각도 없었다. 만력제의 재위기간은, 특이하게도 [[사형/국가별 현황/중국|현재까지도 사형을 유지하고 실행하는 중국 대륙]]에서 '''유일하게 사형이 사라진 시기'''였다. 이것도 만력제의 성품이 어질어서가 아니라, 태조 [[주원장]]이 닦아놓은 [[명나라]]의 시스템은 크고 작은 나랏일 하나하나를 황제가 직접 승인해야 처리할 수 있었는데, 그 황제가 국정을 내팽개친지라 사형 집행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군주가 아무리 신하들에게 자율권을 보장해줘도 사람 죽이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겨둘 수는 없는 노릇이기도 했다. [[청나라]] [[강희제]]는 사형 판결이 나온 죄인의 판결문을 꼼꼼히 살펴본 후 참작의 여지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감형하여, 매년 처형 인원이 100명 이하로 떨어지게 만들었다.] 그래서 사형을 받아야 할 중범죄자들은 감옥에 들어갔다가 죄가 정해지지 않고 20년이 지나면 [[사면]]하고 석방하는 [[대명률]] 규정에 의해 도로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사형급이 아니라도 재판을 받아야 할 죄수는 있게 마련인데, 이 사람들에 대한 재판도 제대로 열리지 않아 투옥된 죄수들 대다수가 재판도 못 받고 죽어갔다. 거기다 만력제는 사후에 자신이 묻힐 무덤을 건설했는데, 이를 대규모로 하는 바람에 건설비로 재정을 또 다시 무지막지하게 까 먹었다. 그의 송덕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혔다. >'''[[레오니트 브레즈네프#s-2.4.11|짐의 공덕이 너무 크므로 세상 말로 표현할 수 없도다.]]''' 이러한 양식은 무자송덕비라고 해서, 황제에 대한 칭송과 역설적인 겸손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며 동양에서는 아예 전례가 없는 양식은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측천무후]]의 경우에도 이러한 비를 세웠다. 무자송덕비에는 또 다른 까닭도 있는데, 명나라의 전통 아닌 전통이었기 때문. 명나라는 [[홍희제]] 이후로는 능에 비석을 세우지 않아 당연히 비문도 없었는데, [[가정제]]가 자기 무덤을 지으면서 오랜만에 비석을 세웠다가 신하들의 상소로 역대 황제들의 비를 전부 세우게 되었고, 당시 법도상 황제의 비문은 후대 황제만 지을 수 있었는데 [[가정제]]가 귀찮아서 스킵하는 바람에 [[가정제]] 이전 전대 황제 7명의 비석이 모두 글자가 없는 무자비가 되었고, 후대 황제들 중에서도 [[가정제]]의 선례를 따라 무자비를 택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만력제의 무자송덕비도 이런 전통을 따른 것이라는 견해다. 게다가 조정의 크고 작은 일들은 최종적으로 결재할 사람 없이 산더미처럼 밀려 신하들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행해져야 했으므로, 제국은 겉보기에나 간신히 현상유지가 되어보였을 뿐 내부는 점점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말년에는 만력삼대정과 [[사르후 전투]] 등의 대삽질로 제국 동북방의 군사적 요충지인 [[요동]]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 상실한 [[요동]] 지역은 [[명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되찾지 못했다. 어쨌든 이렇게 태업하는 동안 명 제국이 겉으로는 그럭저럭 굴러갔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그 30년 동안 어떠한 제도 개선이나 사회 개혁이 일어나지 못했다는 것. 이 시기 동안 [[장거정]]의 개혁정치, [[동림당]]의 등장, [[양명학]]의 발흥 등 부분적인 개혁 운동이 발생하긴 하였으나, 이것도 황제가 받아들여 정치에 포함시킬 때 의미가 있는데 황제 스스로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니 그저 민간 차원의 운동으로 흐지부지 끝나버렸다. 일반적으로 [[군주]]들이 사치스럽거나 음란해서, 혹은 지나치게 잔인해서 나라를 멸망시킨 것과 달리 아무것도 안 해서 나라를 멸망시켰다는 것이 색다른 점이다. 본인도 자기가 아무 짓도 안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는지 말년에 스스로 "짐은 무위의 도로 나라를 다스리고 있다." 고 드립도 쳤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