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만력제 (문단 편집) === 말년 === 말년에 가면 만력제는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야사에 따르면 만력 41년(1613) 9월의 어느 아침에 튼튼한 말을 탄 한 이민족 여인이 만력제의 시야에 들어왔다.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 광경에 황제는 질식할 것 같았다고 하며 말발굽 소리는 그의 신경을 밟는 것 같아서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느꼈다. 말이 뛰어오자 먼지가 일었는데 먼지가 마치 구름처럼 말의 사방을 에워쌌다. 여인은 긴 창을 들고 만력제를 향해서 돌격해 왔다. 만력제가 말을 탄 여인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하기도 전에 가까이 오자 만력제는 비명을 질렀는데 자신이 용상에 누워 있으며 이마에는 식은 땀이 엄청나게 흐르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꿈이었던 것이다. 만력제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지만 말년에 들어서 허약해진 몸이 아파왔다. 곁에 있는 [[환관]]은 이마의 땀방울을 닦아 주었는데 만력제는 환관에게 대신들을 불러오라고 명령했다. 대신들이 이렇게 황제를 대면하는 것이 사실인지를 의심할 정도로 황제와 만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신하들은 줄줄이 들어와서 처음 보는 만력제의 용상 아래에서 무릎을 꿇었다. 황제가 그들에게 자기가 꾼 기괴한 꿈을 이야기하자 사관이 이를 옮겨 적었는데, 만력제는 신하들에게 이 꿈의 뜻을 풀이해 달라고 했다. >그대들은 피휘를 할 필요가 없다. 기탄없이 말해 달라. 그러자 관리들은 금방 답을 내놓았는데 그 해석은 이러했다. 꿈 속의 [[여진족|이민족 여자]]가 말을 타고 창을 들고 있다는 것은 [[청나라|대명(明)의 강산을 빼앗겠다]]는 뜻이라고.[* '여진([[女]][[眞]])'에는 여자 '녀(女)'가 들어 있다. 오랑캐 여인이 꿈에 나온 게 우연이 아니었던 것.] 그러나 만력제는 그 해몽을 믿었는지 아닌지는 몰라도 그 말을 듣고도 계속 놀아제꼈다. 만력 44년(1616)에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누르하치]]가 허투하라에서 칸자리에 올랐을 때 만력제가 3년 전의 꿈을 기억해 냈을지는 참 궁금한 사실이다. 자신의 꿈에 나왔던 누르하치가 [[중국]]의 동북부에서 나타났지만 만력제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이미 발생한 사실에 대하여 황제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변방의 분란도 그의 식어버린 열정을 되살리지 못했고, 명나라는 망국의 길을 걸었다. 만력 47년(1619) 9월엔 이부상서 조환의 호소에 의해 조정 백관은 문화전 앞에 줄줄이 무릎을 꿇고 황제가 친히 조회에 참석하여 정사를 논의할 것을 부탁했다. 관료들이 이런 최후의 방식으로 황제에게 항의를 표시한 것이다. 관리들은 모두 모였으나 오로지 황제만 빠진 상태였다. 그러나 황제는 자신이 참석하지 않는 것으로 그의 존재를 드러냈고 침묵으로 권위를 나타냈다. 하루 종일 [[황상]]은 아무런 명령도 내리지 않아서 항의하던 관리들은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졌다. 그들은 스스로 일어나서 항의를 끝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계속할 수도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게다가 나이들고 약한 관리들은 하루 종일 무릎 꿇고 있으니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버틸 수가 없는]] 상태가 되었다. 황제와의 힘겨루기에서 관리들이 우위를 점할 수는 없어서 결국 사태는 수습이 곤란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자 황제는 대충 때가 된 것을 파악하고는 [[환관]]을 보내 문화문에서 자신의 뜻을 낭독하게 하는데 그 내용은 황당하기 짝이 없다. >"모든 관리들은 집으로 돌아가라." 그리고 조회에 참석하는 문제에 대하여는 그저 두 글자로 답했다. 면담(免談), 즉 말을 꺼내지 말라는 것이다. 조환은 어이가 없어 만력제에게 상당히 패기 있는 글을 올려서 이렇게 물었다. >만일 어느 날 계문(북경 서쪽)이 유린당하고 철기가 경교(京郊)를 짓밟을 때도 폐하께서는 여전히 깊은 궁궐에서 아무 걱정 없이 베개를 높이 베고서 병을 핑계로 해 물리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고집이 더럽게 센 만력제는 관료들의 압력에도 전혀 태도를 바꾸지 않았으며 자신을 위해주는 관리들을 귀찮아했다. 그렇게 신나게 나라를 말아먹은 만력제는 병세가 악화되어 병석에 누워 지내는 일이 많아졌고[* 어지럼증에 시달렸다.] 그가 황제의 자리에 있은 지 48년이 지난 1620년, 8월 18일에 자금성의 흥덕전에서 아주 평안하게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24년이 지난 1644년 꿈의 해몽대로 [[청나라]]가 명나라의 강산을 빼앗았다. 공교롭게도 이 해가 만력제 탄생 80주년을 갓 넘긴 시점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이 친히 설계에 참여한 정릉(定陵)에 묻혔다. 그의 관은 효단황후와 효정황후, 즉 공비 왕씨 사이에 놓였다. 묘호는 [[신종]]. 보통 딱히 업적이 없거나 한 일이 없는 군주에게 묘호를 안 주기도 뭐하니 어쩔 수 없이 붙이는 묘호라는 걸 감안하면 잘 어울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