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만월대 (문단 편집) === [[황성#s-2|황성(皇城)]] === 고려 태조가 궁예의 신하였을 시절에 쌓은 발어참성(勃禦塹城)(간혹 송악성이라고도 함)이 원조이다. 후손인 현종이 나성을 축조하며 동시에 발어참성을 황성으로 재축조하였다. 황성은 당나라식 도성제상 천자(天子)만이 설치할 수 있는 성곽으로 조선 왕조의 경복궁엔 없는 만월대의 특징이다. 개경뿐만 아니라 제 2수도인 서경에도 황성을 축조했다. 고구려 옛 수도를 존중한 셈. 황성은 나성 안의 궁성을 둘러싸는 방어 성이며 내부에 [[중서문하성]], [[상서성]]인 2성 정부 기관이 있고 고려도경에 따르면 부여궁(扶餘宮), 계림궁(鷄林宮),[* 본 문서 상단의 지도에 표시되어 있다. 부여, 계림(신라) 등의 옛 왕조명을 별궁의 호칭으로 삼은 것은 고려인의 역사 계승 인식을 보여 준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https://blog.daum.net/ekasacce/515|#]] 해당 포스팅 말미에선 장안궁(長安宮)(또는 상안궁(常安宮))의 존재를 들어 은근히 [[유사역사학]]스러운 떡밥이 언급되지만, 고구려의 [[장안#s-3|장안성]], 즉 평양을 이르는 말로 보는 것이 합당할 듯하다.] 적경궁(積慶宮) 등 [[만월대 내 별궁]]이 있었다. 고려사 왕경 개성부 지리지에 따르면 황성은 2천 6백 칸이었고 총 20개의 대, 중, 소문이 있었다고 한다. * {{{+1 '''광화문(廣化門)'''}}} '''황성의 동대문이자 정문(正門).''' '''정전으로 가기 위한 첫 번째 대문.''' 문의 이름은 '널리 교화하는 문.' 이중루이며 윗층엔 누각이 있다. 특이하게 남대문이 아닌 동대문이 황성의 정문이다.[* 광화문이 황성 성문 중 특별 취급되긴 했으나 동문이라서 명목상 황성의 정문은 남문인 주작문이었을 거라는 주장도 있다.] 이는 고려가 최대한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성과 궁을 쌓았기 때문이다. 인종 대 본궐을 묘사한 고려도경에 따르면 나성 서문 선의문과 비슷했으나 옹성이 없고 더 화려했다고 한다. 황성 동쪽 안에 큰 연못 동지(東池)가 있었다. 조선조 [[경복궁 광화문|경복궁의 광화문(光化門)]]과는 한자가 다르며 문의 용도, 위치도 다르다. 경복궁 광화문은 궁성의 남문(정문)이지만 만월대 광화문은 황성의 동문(정문)이다. * '''주작문(朱雀門)''' 황성의 남대문. 이름은 도교의 영향을 받은 남쪽의 신령 [[주작]]의 이름을 따 왔다. 동아시아 도성제 통념 상 남문이 정문으로 취급되니 주작문이 황성의 정문이란 주장이 많다. 하지만 정작 고려가 황성 대문 중 가장 중요시한 문은 동문 광화문이라 반박 주장도 많다. [[덕종(고려)|덕종]] 재위 3년째인 [[1034년]]에 주작문의 벽에 벼락이 떨어졌다고 한다. * [[현무문]](玄武門) 황성 및 궁성의 북대문이다. 황성과 궁성의 북쪽 성벽이 연결되어 있었다. 주작문과 대칭되는 도교 속 신령 [[현무]]의 이름을 썼다. * '''신흥사(新興寺) - 공신당(功臣堂)''' [[신흥사]] 문서 참조. * '''대봉은사(大奉恩寺) - 효사관(孝思觀)''' [[봉은사]] 문서 참조. * [[환구단]] 문서 참조. 환구단은 전통적으로 남교(南郊)에 지으므로 황성 남쪽 주작문 부근에 있었을 것이다. * [[종묘|태묘]] 문서 참조. 고려의 종묘. * [[사직]] 문서 참조. 고려의 사직.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