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만월대 (문단 편집) ==== 정전으로 가는 길 ==== [[파일:신봉문터.jpg]] ▲ 오늘날의 신봉문 터. 바로 앞에 보이는 다리가 만월교. * {{{+1 '''승평문(昇平門)'''}}} '''궁성의 남대문이자 정문(正門).''' '''정전으로 가기 위한 두 번째 대문.''' 이중루, 즉 층이 두개로 되어 있는 문이다. 문의 뜻은 "바름으로 올라가는 문." '''이 승평문이 바로 [[경복궁]]의 [[경복궁 광화문|광화문]] 격이다.''' 인종 대 본궐을 묘사한 고려도경에 따르면 문의 제도가 매우 크고 웅장했다고 한다. 문의 모서리에 동(銅)으로 된 장식을 매달았다고 한다. 승평문의 안쪽 양 옆에는 동락정(同樂亭) 이라 이름 붙힌 정자 2개가 있었다. 3칸짜리 정자였는데 후 [[최이]]가 6칸으로 증축했다. [[고려도경]]에 따르면 승평, 신봉, 창합, 회경전문은 3문 형식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만월대 터에 남아있는 유적을 살펴 보면 위 네 대문은 모두 천자국 제도인 5칸으로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즉 고려는 문은 일단 황제국처럼 5칸으로 세운 뒤, 사신 방문시에는 3문만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5칸 3문의 절충안은 조선 왕조의 [[창덕궁 돈화문]]에서도 보이며 경복궁 광화문의 경우도 광화문 자체는 3문이나 양 옆에 전각이 딸린 수문을 2개 두어 절충점을 찾은 것으로 보인다. * 구정(毬庭) 승평문을 지나면 나오는 큰 광장. 고려 ~ 조선조까지 유행했던 스포츠 격구(擊毬)를 하기 위한 광장이다. * 만월교(滿月橋) 구정 북쪽에 있는 다리로 배산임수에 따른 궁 앞에 흐르는 강 광명천(光明川)을 지나기 위한 금교(禁橋)다. * '''신봉문(神鳳門)''' 광명천을 지나면 나오는 대문. '''정전으로 가기 위한 세 번째 대문.''' 역시 이중루이며 윗층은 신봉루(神鳳樓)라고 하여 모든 대문 중 가장 화려했다고 추정하는데, 신봉문은 위치한 쪽에서 남향으로 넓은 구정을 바라 볼 수 있으니 매우 웅장했을 것으로 보인다. 역대 왕들이 등극시 관례로 신봉루에서 사면령을 선포하거나 군대를 사열했다. 고려사 예지엔 신봉문에서 사면령을 내릴 때의 순서와 예법을 항목을 따로 내서 기록했다. 또한 팔관회 때의 의례도 기록했는데 고려 왕은 자황포(금색 단령)를 입고 신봉루에 앉아 송나라 사신, 여진 사신, 탐라 사신의 조하(朝賀)를 받고 그들이 외치는 ''''성궁만복(聖躬萬福)''''(거룩한 몸에 만복이 오길 바란다는 뜻)을 듣는다고 되어있다. 신봉문의 뜻은 '거룩한 [[봉황]].' 나중에 의봉문(儀鳳門)으로 바뀐다. 의봉문의 뜻은 '규범의 봉황.' 위봉문, 영봉문과 봉 자 돌림 문이다. 고려도경에 따르면 신봉문의 간판은 붉은 색 바탕에 금색 글자를 넣었다고 한다. [[이자겸의 난]] 때 [[현화사]] 주지 의장과 승병들이 신봉문을 쓰러뜨리려 했다. * '''창합문(閶闔門)''' 신봉문을 오르면 나오는 대문. '''정전으로 가기 위한 네 번째 대문.''' 궁궐이 산 위에 있기 때문에 이 문부터 본격적으로 계단이 늘어난다.창합(閶闔)은 고대 중국 별자리 전설 속에 등장하는 하늘의 남문 이름이다. 창합문 양 옆으로 작은 문 두 개가 있는데 이름은 모두 승천문(承天門)이다. * '''회경문(會慶門) / 전문(殿門) / 회경전문(會慶殿門)''' 정전의 대문. '''정전으로 가기 위한 마지막 대문.''' 딱히 다른 이름은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래서 문의 뜻은 그냥 전각의 문. 앞에 네 개의 돌계단이 있었으며 5칸으로 지어졌고 3문이 설치되어 있었다. 인종 대 본궐을 묘사한 고려도경에 따르면 긴 창 24자루를 늘여놨으며 근위병이 매우 많이 서 있어 중압감을 느꼈다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